2023 교토그라피 | 천년의 고도, 그 시공간에 담긴 사진

 

2023 교토그라피

 

교토그라피가 개최되는 교토는 천 년간 일본의 수도였다. 신라 천년 고도인 경주처럼 일본 문화의 진수가 여기에 있다. 일본미의 꽃이라고 할까!

교토에는 우리의 자긍심을 북돋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천년 수도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 바로 백제, 신라, 고구려 도래인이었다. 그들이 갖춘 신문물을 통해 종교, 문화예술, 농경, 건축 및 토목 등 일본을 성장시켰기에 한반도의 도래인이 일본사회에서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교토에서 사진 감상 못지않게 우리의 조상이 남긴 유물, 유적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교토 여행의 또 다른 큰 기쁨이다.




신라에서 5세기 후반 집단으로 도래한 ‘하타씨’ 가문은 선진 문화·기술 등을 통해 일본의 국가 형성에 기여했다. 특히 하타씨 집안은 가쓰라강에 큰 제방을 쌓아 그 지역을 농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곳이 대언천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풍광이 수려하며 봄에는 벚꽃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23년 5월 9일 촬영)




백제 도래인 사카노우에 장군이 798년에 청수사를 창건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청수사는 교토 여행의 일번지로서 벚꽃의 명장면으로 이름높다. 이 절은 무려 139개의 기동이 떠받치는 넓은 무대를 설치함으로써 깊은 산속의 아름다움과 넓게 트인 전망을 모두 절집으로 끌어들여 ‘청수의 무대’라는 전설을 낳았다. (23년 5월 9일 촬영)
 
 
교토그라피는 교토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교토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 17곳이나 되며 국내외에서 해마다 약 4천만 명이 찾는 세계적인 역사 도시이다. 도시 곳곳에 사찰, 전통가옥, 전통 건축물이 즐비하다. 이렇듯 교토의 역사가 느껴지는 곳에서 교토그라피의 각각의 전시가 디스플레이된다. 대규모 공간의 미술관이 아닌 교토의 미를 풍기는 19곳의 소규모 공간에서 15가지의 소주제로 나뉘어 열린 것이다. 지면 관계상 공간과 작품의 조화에서 감동을 준 전시와 작품 디스플레이에서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 전시를 중심으로 리뷰를 하고자 한다.

교토그라피의 공동설립자이자 공동 디렉터인 루실 레이보즈(Lucille Reyboz)와 유스케 나카니시(Yusuke Nakanishi) 부부는 11회를 맞는 2023 교토그라피의 대주제 ‘Border’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삶은 다양한 경계에 서식하며 그 경계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경계선들은 우리의 존재를 형성하고 우리의 경험을 구성한다; 모든 형태의 삶을 보호하고, 파괴하고, 차별하고, 구별한다. 인간의 본능은 우리를 진화시키고, 새로운 경계에 직면하게 하고,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도록 밀어붙인다. 차별화하고 경계를 허물고자 하는 타고난 욕구는 생존에 필수적인 강력한 힘이다. 교토그라피 2023에서는 경계 행위, 일시적 상태, 일시적인 순간 또는 미세한 선 등 경계선을 찾는다.”

 



교토그라피의 공동설립자이자 공동디렉터인 루실 레이보즈(Lucille Reyboz, 左) 월간 「사진예술」
이기명 발행인, 유스케 나카니시(Yusuke Nakanishi, 右). 루실과 유스케는 부부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이조성에서 열린
패션사진과 전통복 사진 

유리코 다카기(Yuriko Takagi)의 《Parallel World》는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하이엔드 패션을 입고 있는 모델들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이 전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이조성 내 니노마루궁, 다이도코로 키친과 오키요도코로 키친에서 열렸다. 각각의 사진은 건축물을 건드리지 않고 수평 기둥과 수직 기둥의 기하학적 구조에 반응하며 ‘점’, ‘선’, ‘면’의 원칙에 따라 각 방에 펼쳐졌다. 또한 야외 공간을 차용하여 내부의 작품과 외부의 자연이 연속되는 전시 공간을 구성했다.
작가는 《Parallel World》 라는 전시명이 암시하듯, 두 개의 시리즈로 구성하여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평행 세계를 보여준다. 한 시리즈는 12개국을 여행하며 전통 의상을 일상생활에서 입는 사람들을 촬영한 것이며 다른 시리즈는 19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하이엔드 패션에 관한 것이다.

그는 고급 브랜드의 패션을 촬영하며 제조업체의 진지한 기술과 장인 정신, 주문하는 고객의 진심 어린 열정 등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옷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끌렸다. 하이엔드 패션은 전통적인 옷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사진에는 둘 모두 공통된 애정이 담겨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관해 “우리는 벌거벗은 몸을 가릴 실 하나 없이 이 세상에 던져졌다. 신들은 우리의 무력한 모습을 불쌍히 여겨 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40년 동안 일상에서 전통 의상을 입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패션의 한계를 뛰어넘는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티브의 작품을 촬영해 왔다. 평행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40년 동안 사람과 옷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계속 깊어졌다....중략.....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람과 옷의 관계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행복에 대한 더 깊은 인식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전시 도록에 남겼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양한 프린트 방식으로 재미를 더한다. 대형 디지털 프린트, 아날로그 프린트, 작가가 직접 채색한 작품, 화지, 면지 등의 재료에 프린트한 작품 등을 통해 사진 표현의 깊이와 다양성을 탐구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조성 내 니노마루궁에서 열린 유리코 다카기의 《Parallel World》 전시

 


니노마루궁 오키요도코로 키친에 설치된 작품


 
 
 



Maria Grazia Chiuri for Christian Dior, Haute Couture SS 2021 ⓒ︎Yuriko Takagi / DIOR




Threads of Beauty, India, 2004ⓒYuriko Takagi
 



고대 사찰의 정원을 차경한 공간에서 전시된
자수 혼합사진 

자수 혼합 미디어 작품으로 잘 알려진 라이베리아 출신의 사진작가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조아나 추말리(Joana Choumali)의 《Alba’hian》는 임제종(일본 불교 종파) 대본산 건인사탑두 양족원에서 열렸다. 작가는 코트디부아르 아칸족의 언어로 ‘하루의 첫 빛’이라는 뜻의 전시 제목 “Alba’hian”에서 영감을 얻어 전시 공간에서 새벽빛을 연출시키고자 새벽하늘에 나타나는 색의 그라데이션을 반영하는 반투명도가 있는 천을 설치하여 가렸다. 그 너머에는 순환하는 샘물 연못과 차를 마시는 정자가 있는 에도 시대 료소쿠인 정원이 펼쳐진다. 이 부드러운 반투명성 너머로 정원이 보이는 가운데, 관객들은 환상과 꿈, 과거의 기억이라는 차원과 지금 여기라는 현실 사이의 좁은 틈새에 존재하는 듯한 감각에 빠져든다. 평소에는 일반인에게 정원이 공개되지 않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참선 코스에서나 볼 수 있지만, 교토그라피 전시가 열려서 마음껏 정원을 거닐며 작품과 공간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정자에도 작품이 전시되어 완전히 열린 공간에서 자연광아래 작품을 감상했다.
2016년 해변 휴양지 그랑 바삼에서 발생한 테러 공격 이후, 작가는 예술을 통해 이 충격적인 경험의 아픔을 치유할 필요성을 느껴 느리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작품과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그것은 자수였다. 자수는 그의 창작 과정의 일부가 되었고, 영감을 받은 직관과 작품을 구성하는 물질적 실체를 연결해 주었다. 여러 겹의 천을 이어 바느질하고 프린트 위에 모티프와 그림을 자수하는 오랜 시간은 일종의 명상이 되었다. 작품 하나하나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며 기억과 감정, 무의식을 작품에 쏟아붓는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작가는 교토 시장과 아비장 시장을 촬영대상으로 잡았다. 시장은 강렬하고 다양하며 풍요롭고 항상 활기가 넘치는 곳으로, 지역사회의 이상과 현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모든 국가, 모든 문화권에는 고유한 색, 소리, 향기 등의 개성을 지닌 시장이 있다. 하지만 시장은 공동체 생활의 본질과 본능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모두 비슷하다. 작가는 교토 시장에서 촬영한 이미지를 아비장 시장에서 촬영한 이미지 옆에 배치하고 자수를 통해 두 이미지 사이의 시각적 경계를 모호하게 하여 일본과 코트디부아르의 경계를 혼합하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각 상점 주인이 자신의 상점 앞에서 묘사된 이미지가 색색의 실과 자수 선으로 다른 대륙에 있는 쌍둥이와 연결되면서 우리가 공유하는 인류애를 표현하고 환기시킨다.


 


일본 고대 사찰인 임제종(일본불교종파) 대본산 건인사탑두 양족원에서 열린 조아나 추밀리의 《Alba’hian》 전시

 


일본 고대 사찰인 임제종(일본 불교 종파) 대본산 건인사탑두 양족원에 전시된 작품




LET IT OUT, series ALBAHIAN, 50 X 50 cm, mixed media, 2023 ⓒJoana Choumali




MAYBE I GREW UP A LITTLE TOO SOON, series ALBAHIAN, 80X80 cm, mixed media, 2022 ⓒJoana Choumali




I CHOOSE PEACE, series ALBAHIAN 100x150cm, triptych, 2022 ⓒJoana Choumali




일본 고대 사찰인 임제종(일본 불교 종파) 대본산 건인사탑두 양족원의 정자에 설치된 작품

 
 


캄캄한 공간에서 어두운 조명 아래
생명체의 반짝임을 표현한 작품 

《Life, Cosmic flower》의 작가 각 야마다(Gak Yamada)는 교토그라피 인터내셔널 포트폴리오 리뷰에 참가하여 ‘Ruinart Japan Award 2022’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샴페인 하우스에서 열린 루이나트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프랑스 샹파뉴 지방 랭스로 떠났다. 수확기에 이 지역을 둘러보며 수확한 포도와 나뭇잎, 들판에서 발견한 돌, 교토에서 가져온 금박, 토양과 바다에서 박테리아에 의해 생분해되는 셀로판 등을 촬영했다.

특히 작가가 레지던시 기간 동안 가장 크게 영감을 받은 것은 지하 샴페인 저장고인 크레이에르(Crayères)다. 고대 중세 시대의 오래된 석회암 채석장 유적에 지어진 이곳은 38미터 높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놀라운 공간이다. 작가는 바다에 가라앉은 플랑크톤의 화석화된 잔해로 형성된 천장과 주변 벽을 희미한 주황빛으로 비추며 바라보는 순간, 지금은 사라진 바다 밑바닥에서 한때 이곳에 살았던 원시 생명체의 하얀 시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벽을 만져보니 마른 줄 알았던 벽이 물로 젖어 있었고 하얗게 화석화된 생명체의 퇴적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을 흡수하여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주변의 생명체를 키우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생명의 형태에 공감하면서 문득 생명의 거대한 순환에 동조하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이 전시는 빅뱅부터 별의 형성, 생명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사색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되었다. 야마다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반짝임은 우리 세계의 덧없는 아름다움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존재를 기념한다. 그래서 전시공간을 어둡게하고 작품 밑에서 조명을 하여 반짝임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호수(HOSOO) 갤러리에 열린 각 야마다의 《Life, Cosmic flower》전시 Takeshi Asano 촬영




촬영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설치물, Takeshi Asano 촬영




ⓒGak Yamada
 



가족의 잃은 슬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두 작가 

이시우치 미야코(Ishiuchi Miyako) & 유키 토우야마(Yuhki Touyama) 2인전 《View through my window》은 일본 전통가옥에서 전시되는데, 이 가옥은 일본 전통 방식으로 짜는 오비(일본의 전통 허리띠), 기모노 띠를 생산하는 업체의 공간으로 제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공간이다. 이 공간은 그 자체로 존재감을 발산하며 역사성이 응축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두 작가의 작품은 왼쪽과 오른쪽 공간으로 나누어 전시되어 교차하는 시선을 만들어내며 두 작가의 작품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시우치 미야코의 최신 작품들이 벽면을 꽉채운 배경사진 위에 전시되어 사진 속 사진이 돋보였고 유키 토우야마의 할머니를 향한 슬픔의 암시,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작품은 중정의 밝은 정원과 엇갈리며 세상은 밝지만 작가는 슬픈 현실, 그런 감정을 자아낸다.

이시우치 미야코는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어머니와 잘 지내지 못했다. 작가는 왜 그렇게 어머니와 소통하기가 어려웠는지 궁금했으며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고 싶어서 어머니가 남긴 물건들을 찍기 시작했고, 어머니의 물건을 찍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엄청난 슬픔과 슬픔으로 인한 마비를 극복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유키 토우야마는 할머니를 간병할 때 찍은 사진이다. 2020년, 코로나19 펜데믹이 시작될 무렵 할머니가 암 진단을 받았고, 작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할머니 집에서 함께 살았다. 할머니의 죽음까지 10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자신에 대한 짜증으로 인해 할머니를 돌보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장을 보러 나갔다가 잠깐의 여유를 즐기기 위해 동네를 촬영하였는데, 촬영행위가 큰 힐링이 되었다. 몸이 불편하여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할머니는 벽에 걸린 수묵화만 바라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가 찍은 사진이 할머니에게 볼거리가 되었고 할머니와 대화를 이어가는 소통의 매개가 되었다. 작가는 전시할 때마다 전시 공간과 공명할 수 있도록 이미지를 에디팅하고 설치한다. 사진은 평면의 종이에 인화된 이미지이기에 액자를 제작하고 작품을 설치할 때 갤러리나 박물관이 위치한 공간, 도시의 역사, 문화, 분위기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공간에 따라 사진의 모양과 느낌이 달라진다는 주장이다.
 
이시우치 미야코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유품을 촬영했고 유키 토우야마는 죽음에 임박한 할머니를 간병하면서 일상의 모습을 찍었다. 두 작가는 가족을 잃은 공통의 경험을 했다는 유사점이 있지만, 이시우치 미야코의 사진이 관객으로 하여금 물건의 주인을 상상하게 하는 반면 유키 토우야마의 사진은 뷰파인더 뒤에 있는 사진가, 그의 감정과 정체성에 집중하게 한다.


 

일본 전통 방식으로 짜는 오비(일본의 전통 허리띠)
기모노 띠를 생산하는 콘다야겐베에의 전시공간에서 열린 이시우츠 미야코의 《View through my window》2인전 Takeshi Asano 촬영


 

Mothers 057R ⓒIshiuchi Miyako



 Mothers 005R 11.9 ⓒIshiuchi Miyako

 


Mothers 039 25.4 ⓒIshiuchi Miyako




일본 전통 방식으로 짜는 오비(일본의 전통 허리띠)
기모노 띠를 생산하는 콘다야겐베에의 전시공간에서 열린 유키 토우야마의 《View through my window》2인전 Takeshi Asano 촬영




ⓒYuhki Touyama




ⓒYuhki Touyama

 
 

 
약으로 채워진 전시장 
 
파올로 우즈(Paolo Woods) & 아르노 로버트(Arnaud Robert)의 《Happy Pills》는 사람들을 행복 약으로 이끄는 시스템, 즉 광고의 논리, 공급과 수요의 메커니즘, 나르시시즘적 충동,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 전시는 소비자의 초상화, 행복이 상품인 광고의 세계,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약을 기적적인 탈출구로 여기는 산업화 이후의 인류의 약에 관한 문제를 차근차근 보여 준다.
행복을 정의하는 것은 오랫동안 종교, 철학, 심지어 정치에 위임되어 왔지만 오늘날 과학의 모든 결과를 응용한 약이 대체하고 있다. 거대 제약회사들은 어마어마한 약 마케팅을 통해 약이 모든 사람이 꿈꾸는 행복을 실현시켜 준다고 속삭인다. 약을 통한 변화와 치유의 약속은 효율성, 힘, 젊음, 건강에 대한 꿈을 제공한다.
이 전시는 특히 디스프레이가 독특했다. 전시장 바닥에 땅에 버려진 약과 약 포장지를 촬영한 사진을 배치하여 버려지는 수많은 약들을 상상하게 하고 약을 포장하는 하얀 캡슐을 바닥에 깐 공간에서는 걸을 때마다 플라스틱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나서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실제 약을 판매할 때 들고 다니는 투명 플라스틱 통에 약들을 가득 채워서 설치하는 등 전시장 벽에 작품을 거는 전시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가 엿보이는 디스플레이였다.




Kurochiku Makura 빌딩에서 열린 파올로 우즈&아르노 로버트의 《Happy Pills》 2인전

 


Kurochiku Makura 빌딩, Kenryou Gu 촬영



Happy Pills 001 ⓒPaolo Woods & Arnaud Robert



 
 
상하좌우를 망점으로 채운 전시장 
 

로저 에베르하르트(Roger Eberhard)《Escapism》에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것, 즉 현실 세계나 사회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벗어나러는 현실 도피를 표현했다. 그 주제는 팬데믹으로 외출이 제한된 시기에 작가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그는 스위스에서 오랫동안 커피용 크림 용기 뚜껑에 풍경사진을 인쇄하는 것에 주목했다. 작은 뚜껑에 인쇄된 풍경사진을 고해상 카메라로 촬영한 뒤에 디지털 처리를 통해 이미지의 완성도를 높이고 마지막에는 아주 큰 사이즈로 프린트를 하여 원래 크림 용기 뚜껑 사진에 새로운 해석을 더한 작품으로 완성하였다.

전시장에서 천장과 벽과 바닥을 망점의 패턴으로 채우고 그 벽면위에 작품이 전시되도록 하였는데, 망점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그리드는 이미지의 상업성을 돋보이게 한다. 특히 천장은 빛이 투과될 수 있도록 반투명 플라스틱 재료를 사용하여 망점이 더욱 도드라졌다. 관객은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 망점의 패턴이 나타나거나 사라지거나 하여 관객을 몽상과 현실 세계를 왔다갔다하게 한다.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과도 상통하는 팝아트적인 요소가 강하다.





시마다이(SHIMADAI) 갤러리에서 열린 로저 에베르하르트의《Escapism》전시 Kenryou Gu 촬영




시마다이(SHIMADAI) 갤러리, Kenryou Gu 촬영




Mount Fuji (Escapism, 2022) ⓒ︎Roger Eberhard




 
일본은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이웃 나라이다. 고대에 일본은 한반도의 절대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고 근대에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대게 이웃 나라 간에는 교류와 침략이 활발할 수밖에 없어서, 아주 좋았다가도 최악으로 치닫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적 관계에서 이웃 나라들은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적 관계는 뒤바뀌는 상황이 자주 일어나기에, 5000년 역사에서 35년의 식민지에 대해 열등감을 가질 까닭이 없다. 이제 우리는 일본에 앞서는 분야도 많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일본과 선의의 경쟁을 할 만큼 강한 나라가 되었다. 물론 사진 분야도 마찬가지다.

안타깝게도, 일본에서 95년의 역사를 지닌 <아사히카메라>가 3년 전에 휴간하더니, 재작년에 <니혼카메라>마저도 휴간에 들어갔다. 일본의 사진예술 관련 잡지가 휴간했기에 교토그라피처럼 잘 기획된 국제사진제조차도 깊이 있게 리뷰해줄 전문지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잡지가 일본에서 열리는 사진페스티벌이나 사진전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라 하겠다. <사진예술>은 세계 어느 곳에서 개최되든, 훌륭한 사진전시라면 취재와 리뷰에 있어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 세계의 다양한 사진은 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이 향유해야 할 사진 자산이기 때문이다.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사진제공 KYOTOGRAPHIE
해당 기사는 2023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