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1세대 사진가, 박영숙

두고 왔을 리가 없다

길고 먼 인생길을 걸어왔다면 돌아볼 과거가 켜켜이 쌓이고, 돌아볼 과거가 많으면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이 구십 전후 여인들의 인물사진은 말한다. 두고 왔을 리가 없다고. 한미사진미술관에서 2월 17일까지 계속되는 박영숙 작가의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는 제목에서부터 여성에 관한 상습적인 선입견을 깨버린다.

 
극단 자유 이병복 대표


일제강점기, 해방과 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디지털 세상까지, 폭풍우 같은 격변의 시대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한(恨)’을 연상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그러나 박영숙 작가는 ‘신파’에 손을 젓는다. 물론 이번 전시에 등장한 7명의 여성은 자신이 설 자리를 정하고 당당하게 지켜온, 사회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들이다. 치열하게 살았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으므로 후회가 없는 인생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두고 온 것이 없을까?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말이 아닐까. 10년 혹은 그 이상 연배인 ‘언니’들을 롤 모델로, 그분들이 끝까지 그렇게 살아주길 바라는 70대 중반 작가로서 고백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작가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그녀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그녀들의 삶은 매우 찬란하고 현란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이곳에 서있을 수 있다.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고, 주어진 소명을 다 감당하고, 모두 극복하였기에 여기에 서있는 것이 감동이다.”


그러나 이는 30년 가까이 작가를 지켜본 나로서는 바로 박영숙 작가 자신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제강점기의 끄트머리인 1941년에 태어나 숙명여대 사학과에 다니던 60년대 초부터 사진가를 꿈꾸었으니 작가는 일찍이 ‘신여성’이었다. 살만한 집안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과 기대 속에 어려움 없이 자란 작가는 ‘아버지의 딸’에서 벗어나 여성사진가로 세상과 부딪치면서 비로소 ‘여성’의 정체성에 직면하게 된다. 7, 80년대 가부장적인 한국사회에서 귀염둥이 딸이 아닌, 한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온 몸으로 체험하며 페미니즘에 더욱 깊숙하게 빠져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 1세대 페미니즘 사진가로 확실히 자리매김했지만 지난날 그녀의 고군분투는 감당키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맹하게 정진, 극복하여 여기에 이른 것이다.


온당치 않음에 관하여


 

꽃이 그녀를 흔든다


작가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 운명이듯이 어릴 때부터 사진과 만나고 숙명여대에서 처음으로 사진동아리 ‘숙미회’를 만들고 졸업 후 사진가가 되고 또한 페미니스트로 나아간 것은 어쩌면 차례차례 다가온 운명 같았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토목사업을 하셨어요. 그래서 아주 어렸을 적부터 집에 있는 줄자, 컴퍼스, 분도기 같은 것들을 갖고 놀았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의 카메라를 갖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한 번도 망가진다며 제재를 가한 적이 없으셨고 오히려 이리저리 만져보고 뜯어봐야 원리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셨어요.”


 

꽃이 그녀를 흔든다


그녀의 사진실력은 사학과에 입학하면서 빛을 발했다. 답사를 다니면서 사진을 도맡아 찍었기 때문이다. 사진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없을까 궁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교내 미술동아리에 찾아가 “여기서 사진도 배울 수 있냐”고 묻자 “네가 사진 동아리를 만들면 되잖아”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말이 ‘숙미회’ 탄생의 시발점이 되었다. 사진공부에 목말라 하던 그녀에게 중앙공보관에서 접한 사진단체 ‘살롱 아루스’의 전시는 눈에 번쩍 뜨이는 발견이었고, 그 이후 살롱 아루스의 회원이 되면서 사진을 제대로 공부하고 마침내 교내에서 사진동아리인 ‘숙미회’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1966년에 중앙공보관에서 “박영숙 사진전”을 연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하게 되었지만 얼마 못가서 잘리고 마는데 그 이유가 “저 사람은 아이 둘을 키우는 가장이니 네가 그만두어야 하지 않겠느냐”였다. 밤낮 씩 웃는 여성사진을 표지사진으로 내미는 선배에게 반발했더니 그 갈등을 잡지사에서 그런 식으로 봉합한 것이다.


 
“당시에는 순진해서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어요. 그런가보다 하고 그냥 나왔어요. 그런데 아주 나중에야 이 사회가 여성에게 뭔가 온당치 않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지요.”


 

미친년


여성에 대한 온당치 않음을 더 자주 더 강하게 깨닫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하게 되었는데 80년대 이후였다. 1992년에는 페미니스트 단체인 ‘여성미술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했고 1998년에는 한국여성사진가협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쯤에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사진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가장 강하고 화려하게 발화한 작품이 ‘미친년 프로젝트’였다.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미친년


‘미친년’은 발음하는 순간 폭발음이 강렬하다. 1999년 ‘미친년들’을 발표하면서 2005년까지 9개 연작으로 계속되었고, 박영숙 작가의 브랜드가 되었다. 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를 들춰내고 꼬집는 발칙한 이 프로젝트는 불온하고 불길하게 받아들이는 쪽과 미친년(?)처럼 박수치고 환호하는 상반된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박영숙 작가의 페미니즘 사진이 제도권으로 등장하여 논의되고 담론을 만들어내는 발화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내 사진 속 모델들은 윤석남이나 이혜경 선생 같이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 하는 가까운 동료였어요. 모델로는 아마추어지만 서로 토론하며 자신의 아이디어를 보태는 창의적이고 열성적인 모델이어서 촬영을 해나가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이러한 토론과정이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었고, 그런 과정이 응집되어 더 큰 공감대를 일으켰으리라고 생각해요.”
 


박영숙 작가는 주위에서 뜻을 함께 하며 페미니즘을 함께 공부하고 실천해나가는 여성운동가들을 카메라 앞에 서게 함으로써 내밀한 진정성을 보여주고자 했고, 사진가와 대상의 거리감을 없애고 오히려 동지적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1999-2005년 사이 진행된 ‘미친년 프로젝트’는 작가의 여성의식을 체계화시켜준 페미니즘 학습과 활동의 창조적 결실이었다.”고 평한 전시기획자 김홍희 이사장(백남준문화재단)의 말처럼 작가는 페미니즘에 관한 진지한 학습과 오랜 체득을 통해 내재된 사유를 사진으로 풀어낸 것이다.
 

미친년


미치도록 사무치게 집착하고 집중하여 마침내 발화시킨 미친년 프로젝트는 작가의 평생이 녹아 있는 절실하고 진지한 작업이었다. 너무나 강렬한 메시지였기 때문에 사실 2005년 이후 10년 동안 이어진 다른 작업들도 미친년 프로젝트라는 블랙홀로 함몰될 정도였다.


마흔 그리고 칠십



 

박영숙 작가에게 작가로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두 번 찾아온다. 첫 번째가 유방암 수술이었다.


“여자에게 마흔은 의미 있는 나이잖아요. 더 이상 어리광이 통하지 않는, 정체성을 찾는 나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서른아홉에 유방암으로 가슴을 잃어버렸어요. 그런 일이 없어도 마흔이란 나이가 만만치 않은 변화를 예고하는 나이인데 유방암 수술은 나로 하여금 나의 정체성, 여성성이란 무엇인가를 더 치열하게 고민하게 만들었어요.”


그녀는 자존감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1981년 마흔이 되면서 개인전 “36명의 포트레이트”를 통해 사진가로서 각오를 새롭게 다졌고 1984년에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사진가로서, 페미니스트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시기였다. 80년대 이후 20여년은 말 그대로 열렬하게 열정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을 펼치면서 그것에 기초한 사진작업을 펼친 뜨거운 시간이었다.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우리 봇물을 트자” “팥쥐들의 행진”에서 “미친년들” “상실된 성”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화폐개혁 프로젝트” “헤이리 여신: 우마드” “꽃이 그녀를 흔든다” “내 안의 마녀”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들이 페미니스트 사진가로서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하게 제시했다. 그러나 2007년에 진정한 의미의 상업갤러리를 표방한 트렁크 갤러리를 개관하면서 관장으로 활약하는 동안 ‘박영숙 작가는 미친년 프로젝트’라는 등식이 고정되었다. 이 블랙홀을 빠져나가는 계기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평생 딸에게 신뢰와 애정을 쏟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충격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어 그만 녹초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작가 자신도 죽음이 낯설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워서 1년 동안 ‘죽음’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두고 갈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늙음’에 관해 골똘히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2014년부터 이번에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된 작품들을 촬영하게 되었다.


 

화폐개혁 프로젝트
 

화폐개혁 프로젝트


“1966년, 딸이 중앙공보관에서 첫 개인전을 한다니까 아버지가 전시장을 둘러 보러 오셨어요. 전시장 벽이 낡아서 지저분하다고 툴툴거렸더니 아버지가 ‘마대’를 갖고 오셔서 그 천으로 벽에 빙 둘러주셨어요. 그 위에다 사진을 걸라고 하셨지요.”

 

화폐개혁 프로젝트



화폐개혁 프로젝트


그렇게 늘 지지해주시던 아버지가 94세로 곁을 떠나신 후 작가는 자신보다 연배인 존경하는 언니들을 기록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분들의 삶, 그분들이 풀어내는 이야기를 통하여 “여성 서사(敍事) 여성 사물(事物)”의 첫 번째 전시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언니들의 수다

 

서양화가 김비함
 

흔히 우리의 엄마들은 “얘 말도 마라. 내 이야기를 책으로 엮으면 소설책 몇 권은 될 거다.”라는 말씀을 했다. 격동의 20세기를 여성으로 살아온 엄마 세대들로서는 마음에 구구절절 담아둔 사연이 그만큼 많을 수밖에 없었을 터다.


“예전에 엄마와 할머니가 나누던 대화가 이제야 내게 언어적인 맛을 느끼게 해요. 맥락 없어보이던 그 이야기들이 덩어리 채로 와 닿는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인터뷰한 영상을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어요.”



작가는 7명 언니들의 인물사진과 함께 인터뷰 영상들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극단 ‘자유’ 이병복 대표(이 분은 전시 중인 12월 29일에 돌아가셨다) 안동할매청국장을 운영하는 이상주 여사, 서양화가 김비함, 서호미술관 이은주 대표, 명창 최승희,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배영환 회장의 아내 박경애, 이렇게 7명의 8, 90대 여성들은 고운 커텐으로 구분된 7개의 방에서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준다.
 

명창 최승희


“내가 언니라고 부르며 가장 존경하는 언니들의 가장 은밀한 사연을 풀어내고 싶었는데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오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두 세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서 밑줄을 긋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15분 내외로 짧게 줄여서 편집하여 영상을 만들었어요.”


하긴, 여자들은 안다. 앞뒤 맥락이 이어지지 않아도 척 하면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귀보다 먼저 가슴이 듣고 알아챈다. 남성의 언어구조와 다른 여성의 수다는 논리적이거나 학술적이지 않아도 통째로 이해가 되는 서사구조를 갖는다. 작가는 앞으로 진행할 프로젝트 “여성 서사 여성 사물”의 첫 번째 이야기가 “두고 왔을 리가 없다”로 시작한 것도 여성들의 삶 속에 얽힌 다양한 사연을 통해 모든 여성들의 삶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자 함이었다. 작가가 두 번째 전시로 여성의 독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호미술관 대표 이은주
 


“나도 가끔 혼자 거울 앞에서 독백을 하거든요. 야, 너 이제 많이 늙었구나. 또는 너 사느라고 애 많이 썼다 등등... 여성들이 거울 앞에서 독백하는 걸 촬영하려고 해요.”


내러티브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여성의 독백이 타인에게 털어놓지 않는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비춰지는 삶에 급급했던 여성들이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처럼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기 자신과 만나는 순간에 꺼내놓는 사연은 무엇일까? 작가는 그녀들의 독백에 자신을 얹혀놓고 그저 따라갈 것이라고 밝히는데, 원래 언니들의 수다는 끝이 없는 법이니 작가의 “여성 서사 여성 사물”도 어디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다.


작업과 같이 늙어가고 싶어

아라리오 갤러리 소속작가인 박영숙 작가는 연말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2016년 5월에 아라리오 갤러리 천안에서 “미친년 발화하다”로 회고전 성격의 대규모 사진전을 열면서 그동안 작업을 총정리한 작가는 그것이 재출발점이 되어 지금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새로운 작업을 발표했고, 연말 전시에 이어 앞으로도 계속 새 작업을 이어갈 것이라 했다.

 
“여성주의적으로 사유할 것이 내게는 많아요.”


그래서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도 곁들였다. 작업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작업과 함께 늙어갈 수 있으니 작가로선 최고의 행복이다. 작가는 늙음으로써 사유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경험하고 그것을 기록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좀 늦되는 편이예요. 철딱서니도 없고 눈치도 없고... 눈치 볼 필요 없이 자라서 그런가 봐요.”



 

박영숙 작가, ⓒ곽명우


60대 이후 그녀의 작업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으니 늦된다는 표현에 무리가 없어 보인다.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보랏빛으로 물들인 짧은 헤어스타일과 화려한 보랏빛 코트는 분명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패션이다. 그 모습에서 50여 년 전, 카메라를 어깨에 멘 멋쟁이 여대생이 오버랩 된다. “이 나이에 뭘”이라는 망설임이 추호도 없는, 그래서 철딱서니 없는 소녀 같고 당당한 ‘우리들의 언니’ 박영숙 작가. 사진을 통해 듣게 될 작가의 다음 이야기가 즐겁게 기다려진다.


박영숙 사진전 “두고 왔을 리가 없다”
2017년 12월 16일-2018년 2월 17일 한미사진미술관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박영숙 작가

해당 기사는 2018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