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남아 역사가 되다 ① : 4.19혁명 그날 사진기자, 총격현장에 있다


 Ⓒ이명동

4.19 혁명 당시, 부정선거와 부패한 권력에 항거하던 국민의 편에 서서 대통령의 퇴진에 목숨을 건 사진기자가 있었다. 그가 국가 권력의 정당하지 못한 폭력 행사를 촬영하기위해 총격 현장을 지켰던 것은 사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사진기자의 소명의식과 불의에 맞서고자 하는 사회 변혁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포토저널리즘은 현장을 대상으로 한다. 사진기자가 그 곳에 함께 있었다는 현장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생생한 역사적 현장과 직접 맞닥뜨리게 한다. 이것은 상상력으로 제작이 가능한 기록문학이나 기록화가 지닐 수 없는 사진과 영상만이 갖는 현장성이다.

1960년 4월 19일 오후 1시 30분경. 경무대(청와대의 전 이름)의 최후의 저지선을 향해 학생과 시민이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것은 경찰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국가원수의 최후 방어선이기도 했다. 이제 경찰로선 공포탄과 최류탄과 물대포가 아니라 실탄 사격을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신문기자들이 많았는데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동아일보 이명동사진기자는 “역사적 현장을 증언할 기자가 나혼자 뿐이니 오히려 영광이지 않은가”라며 스스로 다짐하면서 카메라에 새 필름을 장전했다.

물대포를 쏘았던 소방차 3대를 탈취한 시민과 학생은 세 대의 소방차에 분승했다. 고등학생이 시동을 걸었는데 사이렌 소리를 끌 줄 몰라 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그리고 대형 태극기가 소방차 앞에 걸리고 학생과 시민이 너나없이 소방차에 올라타고 애국가를 부르며 경무대로 나아갔다. 수천 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노도와 같이 밀려가고 있었다.

1시 40분경, 최후의 저지선인 경복궁 후문의 원형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학생과 시민 그리고 경찰의 간격이 10여 미터 정도로 좁혀졌을 때에 경찰이 연막탄을 터뜨리면서 무차별 실탄 사격을 개시했다. 경무대 어귀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소방차 위에 탔던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이명동사진기자 어깨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데, 가슴에 카메라가 세차게 부딪쳤다. 그때 “아! 내가 이것을 찍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후퇴하고 있는 학생과 시민 사이로, 카메라를 한 손에 움켜쥐고 엎드린 채로 도망가면서 뒤를 향해 셔터를 끊임없이 눌러 대었다. 그때 소방차를 뒤로하고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학생과 시민 사이에서 두 명의 학생들이(사진 속 화살표 표시) 총을 맞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충격적인 모습이 찍혔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은 백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천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날을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명동사진기자의 4.19 경무대발포사진은 독재권력이 국민을 향해 부당하게 살상을 저지른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지금 우리는 30년마다 도래하는 국민혁명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 민주항쟁. 그리고 2016년 12월 촛불시민혁명 ……

 

글 이기명 (발행인 겸 편집인)
해당 기사는 2017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