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내작가 ⦁ ⦁ 사진이 온다 - 조경재의 ‘사진적’인 세계
- 2024-12-26 12:02:22


계단02,150x120cm, 2015 ⓒ조경재
카메라 프레임을 월담하고 안팎을 넘나들며 이룬 추상의 세계. 조경재는 오브제를 수집하고 구축하고 허물고 배치하고 변형하기를 반복해 종내 사진으로 옮겨온다. 사진 프레임의 경계를 확장하거나 무마하며 사진과 조각, 설치를 병행한 조경재의 작품은, 본다는 것의 프레이밍을 계속 해체한다. ‘쓸모없이 세운, 유용한 사진 미학’.
필자는 조경재의 작품 세계를 살피며 ‘무의미의 의미’, ‘무용(無用)한 유용(有用)’이라는 역설이 작가의 작업에 다가서는 행로 중 하나임을 알았다. 이는 작가가 작품 제작 행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눈앞에 있는 대상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대상에 대한 의미 부여 없이(개념 없이) 다만 보이는 데로 촬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다.’라는 말에서 작가의 작업 관을 다시 짚어본다. 사진은 일반적으로 대상-피사체가 가진 ‘의미’가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마련이다. 사진을 촬영할 때 작가들이 사진에 공통의 상징 코드를 심어주거나 보편의 사진 언어를 취하는 것도 작품의 의미화에 쉽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품의 개념화에 저항하며, 조경재가 사진 매체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조경재의 작품 세계를 살피며 ‘무의미의 의미’, ‘무용(無用)한 유용(有用)’이라는 역설이 작가의 작업에 다가서는 행로 중 하나임을 알았다. 이는 작가가 작품 제작 행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다. ‘눈앞에 있는 대상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대상에 대한 의미 부여 없이(개념 없이) 다만 보이는 데로 촬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다.’라는 말에서 작가의 작업 관을 다시 짚어본다. 사진은 일반적으로 대상-피사체가 가진 ‘의미’가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마련이다. 사진을 촬영할 때 작가들이 사진에 공통의 상징 코드를 심어주거나 보편의 사진 언어를 취하는 것도 작품의 의미화에 쉽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품의 개념화에 저항하며, 조경재가 사진 매체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Juan002, 120x95cm, 2022 ⓒ조경재

골마루, 100x90cm, 2022 ⓒ조경재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작가가 아니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바르트는 그의 저서 『저자의 죽음』에서 기성에 고착된 개념과 인식에 균열을 가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현대사회의 독사(doxa)를 해체하고 전복하려는 그의 수행은 ‘저자의 죽음’으로 구체화 된다. ‘저자의 죽음’이란 예술 작품의 창작자인 작가 주체가 사라지고 작품을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독자가 새롭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작가에 대한 일반의 통념 즉, 작가는 천재적이고 독보적으로 작품 이전에 선행하기에, 작품의 탄생에 전적인 영향을 행사하고 의미를 규정한다는 ‘독사’를 탈신화 하려는 기획이었다. 작품의 의미는 저자에 의해서만 설명이 되고 고정된 의미, 최종적인 기의로 규정되어 온 것이 통념이었다면, 바르트는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언어를 옮겨 쓴 사람일 뿐, 저자의 글쓰기는 어떤 사상이나 정념, 인상의 표현이 아닌 “단순한 기재(inscription)의 몸짓”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품을 쓰는 것은 창조가 아닌 조합의 작업이기에, 독자들의 다양한 해석에 따라 작품은 생명성을 획득하고 스스로 의미를 끝없이 생성해나간다는 것이다. 현대미술에서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 소환된다면, 작품의 고정된 의미는 부재하고 관객의 적극적인 보기에 의해 작품의 의미망은 생성될 수도 소멸될 수 있음을 역설할 때이다.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는 기호 읽기를 방해하거나, 은폐된 기호를 깨우려는 시도이다.
“눈앞에 있는 것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이는 그대로를 촬영하려고 했습니다.”
조경재


금곡피아노, 사진, 잉크젯프린트, 180x150cm, 2021 ⓒ조경재

블루치즈 ⓒ조경재
조경재의 기하학적 평면과 추상을 바르트의 사유를 경유하며 다시 보니 형태감이 단단해진다. 콜라주처럼 화면을 구성하거나 오브제를 모으고 설치, 배치하는 과정을 반복해 탄생한 3차원의 공간이 기하학적이고 비묘사적인 2차원의 평면-사진으로 옮겨오며 점, 선, 면이 대담한 조화를 이루기도 한다. 작가는 의미의 닻(caption)을 회피하기 위해 작품의 제목도 무심히 붙였다. 각각의 제목들은 사진 속 작은 파편을 지시하거나 뉘앙스만 제시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유도한다. 읽을 수 없는 단어를 조합하거나, 정반대로 익숙한 명사를 붙이기도 한다. 작품 해석의 많은 몫을 관객에게 넘기려는 작가의 의도이다.
조경재의 작품을 읽기에 실패하고 대신 작품이 관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면 ‘저자의 죽음’에 도달한 것이다. 아니면 작품이 스스로 의미 생성의 주체가 되었거나. 사진에서 의미를 찾거나 사진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바르트식으로 얘기해 ‘사진에서 스투디움을 기대한다면’, 조경재의 작품은 불친절하고 불편하게 다가올 것이다. 바르트가 보편이 아닌, 결국 개별적인 앎(mathesis singularis)의 차원에서 사진 보기 경험을 ‘모험’(Photography as Adventure)이라고 한 것은 본다는 것의 존재론, 그 아름다운 가치 때문이리라.
조경재 작가 또한 작품을 보는 행위, 경험적인 차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가도 언급했지만, 작가의 스승인 다니엘 부에티(Daniele Burtti)의 영향이 일정 부분 보인다. 다니엘 부에티가 라이트박스(lightbox)를 활용해 만든 일련의 작품들은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화려한 모델이 주인공이다. 그 사진 위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문장을 새긴다. 그의 작품 중에 특별히 빛나는 아포리아.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How Far away Am I from Death?)”(2002) 이 작품 앞에서 관객은 작품 속 질문을 생각하다, 시선은 곧장 여인의 매끈한 육체로 이동한 채 대답을 보류하게 될 것이다. 답을 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지만, 명확한 한 가지. ‘내가 지금 작품을 감상하는 주체라는 것과 작품 속 아름다운 여인이나 그것을 감상하는 나는 언제가 필멸하는 존재라는 것’. 다이엘 부에티가 사진에 문장을 새겨 관객을 유도했다면 조경재는 역으로 ‘말 없는 사진’으로 관객을 사진 속으로 끌어들인다.
조경재의 작품을 읽기에 실패하고 대신 작품이 관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면 ‘저자의 죽음’에 도달한 것이다. 아니면 작품이 스스로 의미 생성의 주체가 되었거나. 사진에서 의미를 찾거나 사진의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바르트식으로 얘기해 ‘사진에서 스투디움을 기대한다면’, 조경재의 작품은 불친절하고 불편하게 다가올 것이다. 바르트가 보편이 아닌, 결국 개별적인 앎(mathesis singularis)의 차원에서 사진 보기 경험을 ‘모험’(Photography as Adventure)이라고 한 것은 본다는 것의 존재론, 그 아름다운 가치 때문이리라.
조경재 작가 또한 작품을 보는 행위, 경험적인 차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가도 언급했지만, 작가의 스승인 다니엘 부에티(Daniele Burtti)의 영향이 일정 부분 보인다. 다니엘 부에티가 라이트박스(lightbox)를 활용해 만든 일련의 작품들은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화려한 모델이 주인공이다. 그 사진 위에 보석처럼 반짝이는 문장을 새긴다. 그의 작품 중에 특별히 빛나는 아포리아.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나요?(How Far away Am I from Death?)”(2002) 이 작품 앞에서 관객은 작품 속 질문을 생각하다, 시선은 곧장 여인의 매끈한 육체로 이동한 채 대답을 보류하게 될 것이다. 답을 할 수 없고, 알 수도 없지만, 명확한 한 가지. ‘내가 지금 작품을 감상하는 주체라는 것과 작품 속 아름다운 여인이나 그것을 감상하는 나는 언제가 필멸하는 존재라는 것’. 다이엘 부에티가 사진에 문장을 새겨 관객을 유도했다면 조경재는 역으로 ‘말 없는 사진’으로 관객을 사진 속으로 끌어들인다.


모든 것에는 깨진 틈이 있지, 빛은 마로 거리고 들어오지 .This is not a chuech 2021 ⓒ조경재

부서진모서리전시전경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2017 ⓒ조경재
“내 그림의 형태가 바로 내용이다.”
엘스워스 캘리 Ellsworth Kelly
화가이자 조각가, 미니멀리스트 엘스워스 켈리는 작품에 개념을 심거나 스토리를 만드는 것보다 ‘보는 행위’ 자체에 주목한다. 작품과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계,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가 중요했다. “내 그림의 형태가 바로 내용이다”라는 말은 켈리의 작업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아포리즘이다. 단순한 형태, 밝은 색상으로 채워진 거대한 색면덩어리의 발화는, 작품 앞에 선 관객에게 제각각 다르게 닿았을 것이다. 회화의 물성 자체를 강조하며 ‘회화성’의 본질을 탐구한 켈리의 작품이 조경재의 근작 <무제2>,
조경재는 수집하거나 발견한 오브제로 구조물을 만들고 해체하고 다시 쌓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최종 사진 촬영을 위한 ‘어떤 형태’를 구축한다.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리고, 화면에서 차지하는 면의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널빤지를 준비하거나 필요한 소재를 구해 와 색다른 병치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 모든 작업 과정 후에 탄생하는 것은 찰나의 사진 한 컷. 사진 속으로 옮겨온 구조물은 촬영 후에 해체되거나 다른 사진의 오브제로 재활용되거나 흩어진다. 즉 ‘사진 속에서만 제 형상을 온전히 보존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조경재가 찍은 대상은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고, 사진이 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조경재의 조각은 사진적인 시공을 지속하다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고 기이한 방식으로 서로를 지지하고 있었다.


조경재, 최연하 촬영, 2024년 2월 2일

참고 이미지. 다니엘 부에 How far
“모든 것에는 깨진 틈이 있지. 빛은 바로 거기로 들어오지. THERE I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조경재
조경재 작가의 ‘사진적’인 행위는 공간 설치 작업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부서진 모서리>(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 2017), <치수(齒髓)를 드러내다>(아마도예술공간, 2018), <모든 것에는 깨진 틈이 있지, 빛은 바로 거기로 들어오지>(This is not a church, 2021) 등 전시를 통해 전시 공간 전체 혹은 부분을 사진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
실제 사진 작품이 벽에 걸리고 사진 속의 기하학적 요소들은 프레임의 바깥 즉, 전시 공간으로 뻗어나간다. 2021년에 열렸던 <모든 것에는 깨진 틈이 있지, 빛은 바로 거기로 들어오지>에서 작가는 사진 작품을 걸지 않고, 전시 공간을 사진적으로 해석하는 기묘한 공간 연출을 시도했다. 실제 교회 건물이었던 전시 공간 내부가 시간에 따라 미세한 움직임을보이고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벽, 마루, 기둥, 계단에 닿아 저절로 만들어낸 빛 조각! 오직 그곳이 아니면 볼 수 없고, 공간 전체가 작품이 되고, 전시가 끝나면 모든 것은 사라질 것을 예고한 전시-공간-작품이었다.
조경재 작가는 조각과 공간을 다루며 사진 추상(회화)을 만든다. 우연히 획득한(발견한) 사물이 의도치 않았던 공간에 놓이고 그 안에서 작가는 사물과 공간과 자신의 관계를 계속 살핀다. 사물들을 조합한 비재현적인 조각은 사진의 추상으로 옮겨 오고, 조각의 물질성이 사진의 물성이 된다. 이를 ‘사진 추상 조각’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조각은 점점 빛과 움직임의 효과에 관여하면서 사진과 조각, 공간의 관계를 사유하게 한다. 작가는 조각, 사진, 물질에 대해 질문하고, 전시의 순간에 대해 질문하고, 현대 사진에 부과된 온갖 질문을 고민한다. 창작 행위자로서 조경재 작가의 수행은 ‘이것이 사진이다!’를 구현하는 과정이었다. 판단을 보류(정지)하고 대상을 한없이 바라보는 태도, 작품과 관객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태도는 그의 주요한 창작방법론이다. 사진이 다가올 때까지, ‘빛이 들어오는 깨진 틈 혹은 부서진 모서리에서 치수(齒髓)’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는 ‘쓸모없이 세운, 유용한 사진 미학’.
글 최연하 독립큐레이터, 사진평론가
해당기사는 2024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