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도시의 감성을 깨우다, 제이 안(J. AHN)

사진가의 시선이 머문 도시가 새롭게 깨어난다. 익숙하고 평범했던 도시를 한순간에 낯설고 특별한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사진가 제이 안, 그녀만의 독특한 심미안과 세련된 컬러 감각이 작동한 결과다. 그동안 발표한 “뉴욕”, “서울”, “파리”, “쿠바”, 그리고 “청계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제이 안은 그녀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회색빛 도시라는 선입견을 깨고 컬러풀하고 역동적인 도시의 일상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진들은 단순한 도시풍경이 아니라 작가의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제이 안 작가의 사진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있는 것 같다. “왜 우리의 도시를 사랑하지 않는가? 이렇게 아름답지 않은가? 왜 당신의 삶을 사랑하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하지 않은가?”

 

제이 안, CITY COLORS.5th AVE.NYC #02, 2009, pigment print, 80×120cm ⓒ제이 안


컬러풀 원더풀

 

제이 안, CITY COLORS.Paris. France #03, 2009, c-print, 120x80cm ⓒ제이 안

사진가 제이 안(J. AHN)의 가슴은 떨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이 보이는 대로변에서 비가 오는 거리를 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침 비가 그쳤다. 그때 한 여인이 젖은 우산을 접어 팔에 걸고 파리 에펠탑이 그려진 버스광고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숱한 사람이 지나갔지만 제이 안은 바로 그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표적에 명중하는 순간은 단 한 발이다. 드디어 광고 속 여인의 헤어스타일과 똑같은 행인의 금발머리가 광고 속 여인과 겹치기 직전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눌렀다. 깊은 생각에 잠긴 여인은 셔터 소리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지나갔다. 파리의 에펠탑 여인의 사진은 그렇게 탄생했다.

 

제이 안, CITY COLORS.Paris.France, 2009, pigment print, 80×120cm ⓒ제이 안


제이 안 작가의 사진은 기다림의 결과다.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쉽게 찾아와 줄 리 없다. 영화감독은 인위적으로 장면을 구성해 만들어내지만 사진가는 느낌이 오는 거리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상상하며 그 상상이 마침내 현실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므로 마침 그곳에서 그 순간이 아니면 찍을 수 없는 사진이 만들어진다. 배경이 될 공간을 프레이밍하고 그 배경 안으로 진입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순간 포착하여 스토리가 있으면서 시각적으로도 완벽한 한 순간, 즉 정적인 배경과 동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드라마틱한 화면을 창조한다. 따라서 고정된 배경과 예기치 못한 사건이 기가 막히게 궁합이 맞는 우연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가는 설렘을 안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다.


작가는 어느 도시를 가도 마음을 빼앗는 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거리에 가면 시나리오를 쓴다. “이때 이런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몇 시간씩 그런 상황이 일어나길 기다려도 지루하기는 커녕 가슴이 뛴다. 물론 허탕 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한낮에 그런 백일몽을 꾸고 있으면 행복하다. 그래서 아침에 카메라를 들고 문을 열고 나가면서 항상 설렌다. 그렇게 행복한 마음이 담긴 제이 안의 도시사진은 놀랍도록 다채롭고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작가의 긍정적인 시선을 통하여 보는 도시풍경은 말 그대로 ‘Colorful’ & ‘Wonderful’ 이다.


작가와 작품의 일치


 

제이 안, CITY COLORS.Paris.France #06, 2009, pigment print, 113×75cm ⓒ제이 안


작품은 작가를 반영하는 거울이지만 제이 안 작가의 경우처럼 작가와 작품이 동일체를 이루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작가의 셀프 포트레이트를 보는 듯 작가와 닮은꼴이다. 달콤하고 유쾌하고 밝고 따스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도시사진들은 작가의 기질과 감성, 미감(美感)과 정감(情感)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래서 “City Colors”로 통칭되는 그녀의 도시사진은 거울에 비친 작가의 모습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이 안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인사동에서 서울과 뉴욕을 찍은 첫 개인전을 연 것이 2007년이었다. 당시 강렬한 색채와 소소한 도시의 일상을 빛나는 삶의 한 순간으로 포착한 사진들은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첫 전시 이후 한두 해 걸러 한 번씩 작가의 개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진들을 계속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데뷔 이전에 이미 오랜 시간 많은 것을 준비해두었음을 짐작케 한다.


제이 안 작가에게 사진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매체였다. 어려서부터 무대 체질(?)이어서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했고 대학시절엔 연극, 졸업 후에는 동양방송(TBC) 아나운서로 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에 노출되었다. 그 후 1980년대 초 미국으로 건너가 세 딸을 키우며 사는 동안 아이들을 열심히 찍어주면서 카메라 앞이 아니라 카메라 뒤에 서게 된 그녀는 사진 찍는 것을 즐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딸들을 찍어준 사진을 보면서 마치 화보사진을 보듯이 뭔가 특이하다고 감탄했어요. 그 당시에도 그냥 셔터를 누르지 않고 세 아이의 의상을 맞춰 입히고 배경을 만들어 찍는 등, 디테일을 중시했거든요.”


8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뉴욕에 살면서 칼리지에서 사진 수업을 들었고 독학으로 틈틈이 사진을 공부했다. 인생의 황금기인 30대와 40대를 뉴욕에서 보낸 작가에게 뉴욕은 서울에 이은 제2의 고향과 다름없었다. 그녀의 카메라가 뉴욕을 겨냥하게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4년 만에 돌아온 서울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뉴욕에서도 이방인이었는데 서울에 돌아오니 이번엔 서울에서도 이방인 같은 거예요. 이렇게 두 도시에서 때론 이방인 같고 때론 고향 같은 느낌을 받는, 이런 상반된 감정이 공존하여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내게는 보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한 도시에서만 쭉 살았거나 관광객처럼 짧게 거쳐 가는 경우가 아닌, 경계인의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보기 때문에 제이 안의 도시사진이 독특한 영역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울로 재정착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해마다 두어 달은 뉴욕에서 머무는 그녀로서는 서울사람의 눈으로 뉴욕을, 뉴요커의 눈으로 서울을 바라보는, 마치 작가의 첫 전시 제목처럼 “Inter-city Seoul NewYork”의 시선이 가능한 것 같다.


쿠바에서 청계천으로


 

제이 안, FROZEN IIN TIME #01, 2011, pigment print, 120×180cm ⓒ제이 안



제이 안, FROZEN IN TIME #31, 2011, pigment print, 80×120cm ⓒ제이 안
 

서울, 뉴욕, 파리가 문명의 발달이 최고조에 이른 자본주의 대도시라면 쿠바는 사회주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정반대 분위기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퇴색한 쿠바의 도시에서 작가는 남미 특유의 원색적인 색깔과 아직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은 쿠바 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아름답게 매치시키며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색깔을 칠한 후 퇴색하면 덧입혀서 또 칠하고 그러는 사이에 색의 두께가 생겨서 미묘한 색감을 드러내는 것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퇴락한 색을 보다가 갑자기 잊고 있었던 청계천 작업이 떠올랐어요. 2002년부터 몇 년간 흑백으로 찍다가 그만 둔 청계천 공구상가 골목을 컬러로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왜 쿠바에서 번개처럼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제이 안, COLOR&CUBA Havana.Cuba #002, 2010, pigment print ⓒ제이 안


생각에서 멀어졌던 청계천 작업을 쿠바에서 떠올린 것은 쿠바의 색에서 받은 영감이었을 것이다.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오래된 폐차 직전의 올드 카(old car)지만 색깔만큼은 환상적인 거리의 자동차들, 세상의 고운 색들은 모두 모아놓은 듯 알록달록한 서민들의 골목. 그곳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놀고 꽃을 든 여인이 지나가고, 햇살이 비껴 들어오고 이윽고 석양으로 물들며 하루가 저물고… 물질적인 풍요가 빚어낸 대도시의 발랄함이 아니라 오랜 삶의 터전에서 대를 이어온 서민들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색을 보면서 청계천을 떠올린 것은 찌릿 전기가 통하는 접속이었을 것이다.


아직 미국과 수교하기 전이어서 지금처럼 관광객으로 붐비지않고 따라서 관광객을 의식한 단장을 하기 이전이라 진짜 그들의 속살을 촬영할 수 있었던 제이 안의 쿠바 사진은 공간과 시간이 쫀득하게 만나 조화를 이룬다. 세월이 빚어낸 색감에 매료되어 쿠바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제이 안은 쿠바에서 돌아온 후 4, 5년 동안 찍은 청계천 흑백필름을 모두 버렸다. 혹시 아까워 미련을 가질세라 과감하게 버리고 컬러로 다시 찍기 시작했다. 쿠바를 본 다음이어선지 청계천의 낡은 컬러가 마음에 스미고 골목의 작은 상가들의 때 묻은 오랜 연륜이 더 정감 있게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일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매주 일요일만 촬영을 진행했지만, 아무도 없이 텅 빈 골목에서도 어제까지 치열하게 하루를 보낸 사람들의 땀과 흔적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겹겹이 쌓인 골목을 보면서 ‘여기가 나의 원더랜드’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골목에는 스프레이를 뿌려 색깔을 칠
해주는 상점이 있었는데 고객의 주문대로 색을 뿌려주다 보니 그 주변에 여러 가지 색깔이 튀어서 노랑과 초록이 뒤섞여 있는 걸 발견했어요. 얼마나 환상적인 색인지…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마다 사연들이 갖가지이고 무지개처럼 색이 다양하니 원더랜드로 느껴질 만하지요.”


쿠바의 골목이나 청계천의 골목이나 서민들이 무지개 색깔의 꿈을 꾸고 희망을 놓지 않으며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서로 통할 것이다. 환상의 나라는 동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진화하는 시간성 탐구


 

제이 안, 3GENERATIONS RED #02, 2015, pigment print ⓒ제이 안


2014년 <청계천> 전시 이후 2016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여성사진페스티벌에서 3세대를 아우르는 “3 Generations” 작업을 발표했다. 2014년부터 본인과 딸, 딸의 딸, 이렇게 3세대가 한 화면 안에 있는 사진을 찍기 시작한 작가는 아들로 대를 이어가는 전통적 관념을 깨고 딸로 이어가는 3대를 작업한다. 1년에 한 번씩 연례행사처럼 뉴욕에 사는 딸과 외손녀가 한국에 오면 ‘위엄’있게 여성 3대의 촬영이 행해진다.


“내게 세 딸이 있는데 막내딸만 딸을 낳아서 저와 막내딸, 그리고 손녀를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내가 딸을 셋 낳는 바람에 처음엔 여자 셋이었다가 지금은 여자 다섯이 되었어요. 그 변화가 참 재미있어요. 그리고 큰 손녀가 어린 나이에도 무표정을 유지하라는 내 주문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아주 진지하게, 무슨 의례를 집전하듯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참 신기해요. 지루할 텐데 동생들에게 웃지 말라고 지시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어요. 나중에 이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내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런 생각도 들고요.”


2013년부터 6년째 사단법인 한국여성사진가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작가는 3세대 작업이 여성사진가로서 할 수 있는 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사진을 본 관람객들이 “나도 이렇게 찍어봐야겠다. 이 사진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라는 말을 할 때 책임지고 이 작업을 끝까지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 아들과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사회에서 늘 뒷전이었던 여성을 앞으로 불러내어 당당히 여신처럼 표현한 3세대 작업은 딸과 손녀가 여성으로서 당당히 살아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이면서 또한 모계 사회의 등장을 암시하는 표식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제이 안 작가를 만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녀는 늘 검정을 베이스로 한 화려한 색상의 옷과 그에 어울리는 모자와 머플러와 장신구 등, 방금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영화 속 여주인공 같이 완벽하다. 이러한 연출력은 사진에서도 그대로 발휘된다. 화려한 도시사진이든 3세대 사진이든, 2020년 10월의 전시를 앞두고 작업 중인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이든 유난히 돋보이는 작가의 시각적인 감각이 빛을 발한다. 다만,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 이면에 감춰진 작가의 메시지다. 사실 작가가 진정 보여주고 싶은 것은 환상적인 색채의 향연 너머 각자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도화지에 ‘아름답게 색칠하기’라는 주문일 것이다. 세상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주어진 삶의 시간이 너무 짧으니 순간순간을 행복감으로 채우라는 바람이다. 제이 안의 행복한 도시 사진 는 11월 12일부터 12월 26일까지 경기도 분당 아트스페이스 J에서 만날 수 있다.


 

제이 안, BEYOND MY LIFE NEW YORK #01, 2018, pigment print ⓒ제이 안

제이 안(J. AHN)은 개인전으로 (인사아트센터, 2007), (인사아트센터, 2009), (윤당아트 갤러리, 2010), (윤당아트 갤러리, 2010), <청계천-기억될 시간들>(세종문화회관 미술관, 2014) 등을 열었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사진가협회(KOWPA) 회장이며, 여성사진페스티벌 조직위원장으로서 <여성사진페스티벌>을 만들었고 2020년 6월에 열릴 제3회 <여성사진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집으로는 『CITY COLORS』(사진예술사, 2009)가 있다.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아트스페이스J


해당 기사는 2019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