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안개가 걷히고 빛의 세계로, 민병헌

민병헌의 “Waterside”
별거 아닌 풍경이 특별해지다

 
물가, waterside, gelatin silver print 2015
 
 
별거 아닌 풍경이, 풍경이랄 것도 없는 풍경이 그에게로 가면 특별해진다. 사진가의 감성이 아니라면 무심하게 스쳐지나갔을 어수룩한 잡초들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서 오래 들여다보게 만드는 민병헌 작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특별하게 대해주면 특별해진다는 깨달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1984년에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33년 동안 그는 젤라틴실버프린트가 표현해낼 수 있는 미감의 극치를 추구해왔다. 그리고 지난달에 스페이스22에서 열린 전시 “물가 Waterside”에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초심으로 돌아가 한결 밝아진 풍경을 8x10인치의 아주 작은 사이즈로 인화, 4년 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보여준 대형프린트와 대조를 이루었다.


물가, 이유 있는 변신


 

물가, waterside, gelatin silver print
 


 화가의 경우 작품을 보면 누구의 것인지 금방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굳이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다는 것은 주제에서든 화풍에서든 소재에서든 그 작가만의 특색이 강렬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에 비해 사진은 극소수의 작가를 제외하고 “이 사진의 작가는 누구”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 극소수의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 민병헌 작가다. 그는 사진을 시작한 이후 줄곧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일관성 있게 보여주었다. “별거 아닌 풍경” “눈” “잡초” “Deep Fog" "누드” “강” “잔설” 등의 사진집에서 보듯이 소재에 상관없이 그에게로 가면 모든 피사체가 형체를 감추며 흑과 백의 세계로 숨어들었다. 피사체는 짙은 안개나 하얀 눈 속으로 숨바꼭질을 했고 혹은 검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죽였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희미하고 신비로운 회색의 사진을 보면, “민병헌 작가 작품이로구나!” 대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물방울 화가, 소나무 작가, 라는 식의 규정은 작가를 자리매김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반면 하나의 굴레가 될 수 있다. 늘 새롭지 않으면 안 되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한정된 타이틀은 한계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흑백프린트를 가장 잘 하고 싶은 민병헌 작가에게도 마침내 다가올 고민이었다. 


 

물가, waterside, gelatin silver print


 민병헌 작가도 처음엔 그저 사진이 좋아서 빠져들었고 흑백사진이 주는 정치(精緻)한 아름다움에 함몰되었다. 마치 흑백프린트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시험하려는 것처럼 계속하여 흑과 백 사이의 스펙트럼을 확장시켜나갔는데 사진의 사이즈에서도 그랬다. 풍선을 어디까지 불 수 있을까, 마침내 터지기 직전의 바로 그 지점이 어디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롤지작업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2013년 가을에 열린 한미사진미술관 초대전 “강”에서 모두 쏟아냈다.


 작가는 전시가 끝난 그해 11월부터 사진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아주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말한다. 마치 단거리 육상선수가 0.01초에 생명을 걸 듯 아주 작고 세밀한 부분에까지 완성도를 높여가며 ‘민병헌의 사진’을 만들어냈고, 젤라틴실버프린트의 애호가들도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롤지작업을 고집스럽게 밀고나가 아름다운 대형 흑백사진들을 보여주었지만 정작 그때부터 “그래서? 지금부터는?”이라는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런데 고민의 돌파구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군산에 꽂히다


 

물가, waterside, gelatin silver print

 
민병헌 작가의 힘은 무엇에 꽂히면 미친 듯이 빠져들어 기어이 끝장을 보는 성격에서 나오는 것 같다. 작업실만 해도 그렇다. 17년이란 세월을 보낸 경기도 양평 서종의 골짜기에서 느닷없이 전북 군산으로 옮겨갔다고 하여 그 이유가 궁금했는데, 군산에 아무 연고도 없고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비오는 날 새벽에 안개를 찍기 위해 들어간 골짜기에 반해 서울 강남의 작업실을 불쑥 북한강변의 골짜기로 옮겼듯이 2014년에는 어쩌다 발길이 닿은 군산에서 발견한 ‘이상한 집’에 마음을 빼앗겨 무엇에 씐 것처럼 앞뒤 보지 않고 일을 벌였다는 것.


 
 "그 집에 홀렸나 봐요. 도대체 어떤 집이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나 궁금해 하던 아내는 군산에 내려와 집을 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가버렸어요. 무섭다고요.”


 그 집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작업에 대한 고민에 빠진 그는 2014년 정월 초하룻날 카메라를 들고 어딘가 가보자고 생각했을 때 문득 떠오른 곳이 남도였다고 한다. 작업실이 양평에 있다 보니 주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를 다녔던 그가 낯선 곳을 가보자는 생각에 남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미적거리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출발하니 군산에서 날이 저물었다.

 
 “남도에서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니 군산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어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군산 일대를 슬슬 돌아다니다가 군산의 오래된 동네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눈에 쏙 들어오는 집을 발견했습니다.”

 

물가, waterside, gelatin silver print


 아주 커다란 집인데 13년 동안 아무도 살지 않아 폐가가 되어 있었다. 한때는 호남의 갑부가 살았다는 그 집은 백년 가까운 세월에 낡고 허물어졌고 손보지 않은 정원의 나무들은 제멋대로 가지를 뻗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망가고 싶은 무섬증이 뿜어져 나오는 집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집이 서울에 와서도 잊히지 않았다. 다시 내려가 알아보니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행정적으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집이라고 했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올라왔는데도 계속 그 집이 맴돌았다. 복잡하고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인 그가 결국은 다시 군산으로 내려가 사방팔방 쫓아다니며 그 집에 얽힌 문제를 풀기 시작, 마침내 첫 눈맞춤 이후 6개월 만에 그 집을 손에 넣었다.

 
 “동네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어요. 그 심난한 집을 손에 넣겠다고 몇 개월을 동분서주하니 미쳤다고 할 만하지요. 나도 도저히 내 성격에 안 맞는 그 일에 왜 그렇게 넋이 나가있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작업실을 군산으로 옮기고 작품세계에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습지에서 양지로 


 

물가, waterside, gelatin silver print


 북한강변의 골짜기 작업실은 늘 습했다. 짙은 안개에 홀려 이사했지만 조금만 비가 내려도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암실작업에서도 물을 만지므로 “나는 운명적으로 물이 체질에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습기 많은 그곳에서 버텼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군산으로 이사를 하고 보니 처음엔 으스스했던 그곳이 의외로 아주 햇빛이 잘 드는 양지였다.  

 
 “예전에는 햇빛 나는 날엔 촬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맑은 날을 싫어했어요. 그런데 군산에서 지내면서 조금씩 햇빛에 적응이 되는 거예요. 글쎄, 내가 대낮에도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거예요.”


 군산을 거점으로 주변을 촬영하면서 안개에 갇혀 희미하던 예전의 사진이 점차 햇빛에 드러난 풍경으로 바뀌고 있음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랐다. 게다가 주변사람들이 “얼굴이 밝아졌다.”는 말을 했다. 군산에서 3년을 지내면서 서서히 사진만이 아니라 사람도 바뀐 것. 처음 사진을 시작했던 서른 살 민병헌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군산으로의 이전은 단순히 작업공간을 옮긴 게 아니라 작품세계, 더 나아가서는 나의 성격까지 변화를 일으키게 만든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어요. 아무래도 그 이상한 집이 나를 부른 것 같아요.”


 환경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가를 실감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예전에는 화분에 식물을 가꾸는 것을 싫어했는데 요즈음 하루 일과가 마당에서 호미 들고 꽃을 가꾸는 것이라면서 자기가 원예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웃었다. 서른 이후 오랫동안 혼자 여행하고 혼자 촬영하고 작업하면서 굳어진 습관들이 만들어낸 일상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서 성격도 바뀌고 작품의 경향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최근작인 ‘물가’가 민병헌에서 크게 벗어나기야 했겠어요? 그래도 뭔가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고들 해요. 예전작보다 훨씬 빛에 많이 노출되었지요?”

 

전시 전경


 8X10인치로 인화한 작은 사진들은 지금까지 그가 즐겨 다룬,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스러운 물가의 식물들이지만 그 작은 화면 안에 작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햇빛의 파편들이 촘촘히 박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을 배우던 초창기에 그랬던 것처럼 빛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수십 년을 작업하다보면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으니 작품의 좋고 나쁨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나의 기분이 좋고 즐거우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요즘 기분이 참 좋아요.”

 

민병헌 작가


4년 전 봄날, 양수리 작업실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편안하고 밝아진 작가를 바라보며 ‘작품은 작가의 거울’임을 재차 실감했다. 그동안 극단적으로 톤을 약화시키고 콘트라스트를 없앴던 작품에서 이제는 톤과 콘트라스트가 살아난 최근작 “물가”는 아마 작가에겐 지난 30년과 앞으로 30년 작업의 경계가 될 것 같다. 그가 더 햇빛 쪽으로 나아갈지, 그 경우에 손실되는 기존에 고착된 민병헌 만의 특색을 무엇으로 채워나갈지 궁금하다. 다만, 그것이 음지든 양지든 한번 꽂히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체 없이 부딪치는 그의 열정이 살아있는 한, 그의 에너지는 완성의 절대미를 향하여 거침없이 분출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병헌 작가다움이므로.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 스페이스22


해당 기사는 2017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