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선|지리산에서 역사를 묻다


지리산에 있는 박하선 작가의 작업실 아래 손님을 위한 게스트하우스. 그가 흙과 나무로 직접 지은 4평 규모의 그림 같은 집이다.
멀리 섬진강 줄기가 바라보이는 데크에서 최근의 지리산 빨치산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리산 흙집
가을 산이 참 붉다. 핏빛으로 붉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노 랗게 물든 나무가 보이고 아직도 초록을 버리지 못한 늦된 나 무들도 눈에 띈다. 저마다 색깔은 달라도, 아니 오히려 저마다 다른 색깔이 함께 어울려 더욱 아름다운 지리산. 서로 달라도 괜찮은데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벌어진 역사적 비극을 지리산은 알고 있다. 산으로 숨어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빨치 산의 비극을 사진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박하선 작가. 그는 지리산의 노고단 자락 해발 400미터에 손수 흙집을 지어 자연 속에 산다. 1,500평의 경사진 땅을 다듬어 그가 직접 지었다는 식당, 본채, 손님이 머무는 집, 화장실, 창고 등 모두 5 채의 집은 각각 6평을 넘지 않아 집이라기보다 방 하나 크기로, 자연을 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소박하고 단출하다.

“이 근처에 사는 지인에게 놀러 다니다가 당시엔 길도 없다 시피 한 이곳을 소개받았어요. 가능하면 지형을 원형 그대로 살리고 나무를 베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베기는 쉬워도 자라 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큰 나무를 피해서 그 사이사이에 집 을 지었습니다.”

틈틈이 흙과 나무로 손수 지었지만 얼른 보아도 전문가의 솜 씨에 버금간다. 10여 년 전에 땅을 구입하여 몇 년에 걸쳐서 한 채씩 지었는데 가장 최근에 1년에 걸쳐 지은 ‘손님 집’은 4평 규모 로 장난감 집처럼 작다. 그러나 그 방에서 맞은 아침은 4,000평 짜리 저택이 부럽지 않았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계곡 아래 문수저수지 위로 물안개가 피어올라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것 같고, 그 저수지 너머로 멀리 섬진강이 은빛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는 작업실이라기보다 작업을 안 하는 집이라고 할까 요. 하루 종일 햇볕이 따가운 평상에 앉아 멍때리기를 하기에 딱 좋아요. 머리를 비우는 집이죠. 대신 여기에 있으면 몸이 바 빠서 하루해가 짧아요.”

그는 아내와 함께 지리산자락에 기대어 작은 채마밭을 만들고 감을 따고 도토리를 줍고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뒷산이 바람을 막아주는 데다 탁 트인 남향이라 온종일 햇살이 머무는 그곳에서 낮엔 해바라기하고 밤엔 별빛을 본다. 사진을 시작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늘 아주 먼 곳, 주로 오지와 험지를 쏘다녔 던 고단한 작가의 삶을 생각하면 보상처럼 주어진 평화로운 공간이다. 사진가가 되기 이전인 80년대 초까지는 일등 항해사로 대양을 누볐고 본격적으로 사진가로 살기 시작한 이후 첫 작업은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던 험난하고 머나먼 실크로드의 여정이었다. 목포해양대학을 졸업하고 항해사로 대양을 누비던 시절부터 그의 역마살은 예정되어 있었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며 낯선 나라, 낯선 항구에 정박한다는 낭만과 설렘을 갖고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월급을 타자 카메라 부터 사서 이국적인 풍경과 넓은 대양을 찍겠다는 포부를 실천 에 옮겼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끝없는 바다에서 광활하 게 산다는 느낌보다 오히려 바다에 갇혀있다는 갑갑함이 생겼 어요. 바다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다가 한 발짝 더 나가 고 싶어도 배 밖으로는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으니까요.”

결국 그는 9년 만에 배에서 내렸다. 내 발로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는 곳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임을 실감했다고 할까. 1980년에 바다에서 찍은 사진들로 “대양”이란 제목의 전시를 열었고, 1984년에 “바다”란 주제로 전시회를 연 이후였다. 그리고 1990년 《실크로드》로 사진가 박하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전까지 그 는 홀로 사진을 공부하며 ‘사진가의 길’을 개척해나갔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20번 이상 촬영을 다녀온 박하선 작가가 주로 소수민족의 공예품을 수집, 훗날 여행박물관을 만들 꿈을 꿨다



광주에 있는 작업에선 흑백 암실작업도 가능하다. 또한 대형 디지털 프린터도 갖추고 있어 흑백과 컬러 작업을 할 수 있다

 

지리산 집의 마당에서 바라본 풍경. 집 아래 문수저수지에서 새벽마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장관을 이룬다.

 
<天葬>으로 2001 World Press Photo 수상
대부분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그렇지만 박하선 작가의 집 념은 유별나다. 그가 처음 티베트에 간 것은 1990년이었는데 그 때 이미 티베트에 천장이란 장례 풍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막기 때문에 접근 자체가 어 려워 촬영은 엄두를 낼 수조차 없었다. 늘 마음에만 두고 계속 하여 실크로드를 다니던 중 1년 반 동안 티베트에서 수도 생활 을 한 우리나라 스님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스님으로부터 추천의 편지와 행동요령까지 가르침을 받고 다시 현지를 찾아 마침내 1997년에 첫 촬영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장례의식을 바라보는 외부인의 시선을 극도로 꺼려요. 그들에겐 최고의 장례식인데 야만적이 라는 오해를 받으니까요. 그러나 소개해준 스님의 공덕이 깊어 서 허락을 받아내 첫 촬영을 한 후 2000년에 다시 보충 촬영을 해서 천장이 소개되었고, 그 사진으로 월드프레스포토 상을 받 고 사진집을 내기도 했어요.”

그 사진을 계기로 그는 유럽에서 전시와 작품 판매 등에 관 한 여러 제의를 받았지만 곧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이야기 했다. 그들의 시스템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도 부담스럽고 그냥 나의 스케줄대로 작업하며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도 좋지만 내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작업에 집중하는 게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몇 개월 들떴다가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하고 싶은 작업에 더 열중해야겠더라고요.”

박하선 작가는 그 이후 우리 역사의 흔적 찾기에 열중했다. 특히 우리의 고대사와 고구려의 역사, 그리고 항일독립투쟁의 현장을 찾아 나섰는데, 이 작업은 당연히 그 시대의 무대가 된 중국, 특히 만주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마치 일제강점기 독립투 사처럼 그는 감시의 눈초리가 사나운 중국 땅에서 고군분투했 다. 신고를 당하여 필름을 빼앗겼다가 되찾기도 했고 교통수단 이 마땅치 않은 곳은 종일 걸어서 당도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에 『발해의 한』(2012), 『태왕의 증언 -고구려』(2017), 『조선의용 군의 눈물』(2019) 등이 차례로 출간되었고, 올해는 <사진가와 열하일기>가 전시와 사진집으로 발표되어 그의 역사 찾기가 하 나씩 결실을 맺었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너무 무관심해요. 단군조선의 역사 도 그냥 전설처럼 받아들여요. 그러나 만주와 시베리아를 들춰 보면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어요. 치우천왕의 무덤이 대표적 인 경우죠. 비석과 무덤까지 남아 있는데 우리 학자들이 오히려 관심을 갖지 않아요. 중국에선 인정하고 성역화를 하고 있거든 요. 동북공정의 일환이겠지만 그들이 되레 우리의 상고사를 선 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사진 작업을 통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역사가 너 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역사는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어서 잘못된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바로잡자는 것. 몇 천 년 전의 역사를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고 생각 할 수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다보면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도 한 10년은 더 해야 단군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끝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니 여기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만주 벌판에 가 있어요.”

그의 사진집 『조선의용군의 눈물』을 보면 참 눈물겹다. 우리 가 소홀히 여기는 항일투사들의 흔적을 중국인들이 고이 모셔 놓았을 리 없으니 남은 흔적이랄 것도 거의 없다. 다만 그들이 일본과 맞서 피 흘리며 싸우다 죽어간 그 산 그 골짜기에 그때 처럼 여전히 황량한 바람이 불어 갈대를 쓸고 긴박했던 그날의 밤처럼 그믐달이 흐릿하게 떠 있을 뿐. 그래도 가끔은 그곳에서 외로운 무덤 하나가 발견되기도 하고 글씨를 새긴 바위가 그날 의 침묵을 깨기도 한다. 불과 100년도 되기 전에 잊어버린 그날 의 역사를 찾아 험준한 산과 들을 헤매는 사진가의 고단함에도 마음이 짠하지만 설마 이럴 줄 알았을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며 타국에서 고생하다 숨진 조선의용군의 결기와 조국애가 처연하다. 그래도 작가가 사진집 말미에 그들 가운데 35명의 이 름을 적어 놓아서 입속으로 한 분 한 분 이름을 부르며 잠시 추 모할 수 있게 한다.


 

백아산과 조계산에서 활동했던 정규현씨(현 88세) ⓒ박하선



피아골 부근의 제5지구당트에서 소년 빨치산 김영승(현 88세)의 모습 ⓒ박하선
 

지리산과 빨치산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아무래도 그의 아주 오래전 조상이 고구려인이었는지, 아니면 독립투사였는지 유난히 만주 땅으로 그의 발길이 향한다 싶더니 알고 보니 그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이었다. 그의 외조부 ‘하상근’이 남해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라고 했다.

“어머니가 외조부의 셋째 따님이셔요.”

그의 광주 작업실에는 어머니의 옛 모습이 담긴 커다란 사진액자가 그의 많은 작품사진들 앞에 세워져 있다. 작가는 보통 일주일의 3일은 지리산에, 4일은 광주의 작업실에 머문다는데 광주천을 내려다보는 건물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암실장비부터 시작하여 컬러 프린터와 험지 여행 중 곳곳에서 수집한 소품들, 사진집과 카메라 등이 빼곡하다. 창문에 암막을 치면 29평의 넓은 작업실이 암실로 바뀌어 흑백암실작업을 할 수 있고 암막을 걷으면 디지털 프린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광주 작업실에서 구례 지리산 작업실까지는 자동차로 1시간 정도. 최근 지리산에서 그가 하고 있는 일은 빨치산의 흔적 찾기다. 시간의 흐름상 조선의용군보다 후일이고 중국이 아닌 우리 땅 지리산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피의 역사지만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것은 매양 한가지다. 그래도 3년 전부터 그나마 남아 있는 흔적을 찾아 지리산을 뒤지고 아직 생존한 빨치산을 찾아가 인물사진을 찍고 있다고 했다.

“이야기만 있고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어요. 그래도 빨치산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 가며 그때의 장소를 찾아보고 그동안 생존한 빨치산 7명을 찍었어요. 대부분 90대여서 생존자를 찾기가 어렵고 다음 달에 촬영하기로 했다가도 그사이에 돌아가시는 분도 계시고 그런 형편이에요.”

그래서 마음이 바쁘다고 했다. 그의 지리산 집 마당에서는 멀리 백운산이 마주 보이는데 그곳이 빨치산의 가장 치열한 전쟁터였다고 한다. 예전엔 백운산 정상에 당시 김선우 전남도당 유격대장 무덤이 있었는데 후손이 이전하여 그 무덤의 터만 촬영했고, 지리산 빗점골에 있는 이현상 빨치산 총사령관이 죽었다는 바위 등, 작은 단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지리산 일대를 꼼꼼하게 살펴본다고 했다.

“인간의 어두운 면도 보여주려고 합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적이 있었나요? 삶 자체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 인간의 솔직한 단면을 보여주려는 거죠. 슬프고 어두운 역사라고 해도 굳이 꺼내서 보여주려는 겁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이었던 한국전쟁에서 빨치산의 행적은 소설가 이태의 『남부군』, 이병주의 『지리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의 소설을 통해서 다루어지고 있지만 박하선 작가는 사진으로 대하 역사 다큐멘터리를 남기려는 것이다.

햇살 따뜻하고 평화로운 박하선 작가의 지리산 흙집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쩌면 지리산이 그를 부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는 그곳에서, 넉넉한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유구한 역사를 호흡하며 그가 사진가로서 찍어야 할 좌표를 남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온 정성을 다해 지은 집의 아궁이 위에 우리 조상들이 남긴 문화유산 속 그림을 낙서처럼 그려넣었다.



해발 400미터에 자리한 산속의 집이지만 하루 종일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하다.
작가는 양지바른 의자에 앉아 지리산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우리 역사의 한 단면, 빨치산의 행적을 사진에 담고 있다고 했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2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