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사진으로 묵상하다, 이종만

산들은 파도처럼 겹겹이 몰려오고 바다는 출렁이며 저만치 멀어진다. 
숲은 하늘을 가리고 이끼는 땅을 덮는다.
사진가는 눈앞에 펼쳐지는 대자연 앞에서 아름다움에 감탄하기 전에 먼저 창조주의 신비를 묵상한다.
사진가 이종만, 그는 풍경에서 신의 섭리를 듣는다고 말했다. 피조물을 통하여 창조주의 메시지를 읽는다고도 했다.
결국 그에게 있어 사진은 신의 음성을 듣고 전하는 기도이자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이종만


바다, 여기로부터

 

전시장 전경

늦가을 강릉아트센터에서 이종만 사진전 “바다, 여기로부터”가 열렸다. 이는 2011년에 전시한 “바다, 저편에서”의 후속작품이자 그의 바다이야기의 완결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종만 작가는 1976년에 사진을 시작한 이후 “바닷가의 24시”라는 첫 사진전(1979년)에서부터 바다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근의 작품과는 사뭇 결이 다른 접근법이긴 했지만 시작은 바다였다.


 그는 강원도 주문진 태생에 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0년간 수산업협동조합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월급쟁이 생활을 한, 항상 바다를 끼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서른 살에 사진가로 출발하면서 바다에 기대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그는 산과 바다가 아름다운 강릉에 살면서 바다와 숲을 소재로 한 일관된 작업을 보여주었다. 강산이 네 번 바뀌는 세월에 사진예술의 흐름도 다양하게 바뀌고 요동쳤지만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그의 작업은 변함이 없이 그대로 견고했다.


 

ⓒ이종만
 

다만, 휘몰아친 변화의 촉발은 사진을 시작한지 2년 후에 접하게 된 기독교 신앙이었다. 신앙심은 그의 사진적인 눈을 만물의 형상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쪽으로 돌려놓았다. 눈에 보이는 대자연의 장엄함이나 아름다움 대신에 대자연을 창조한 창조주의 뜻, 대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그분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마음의 눈을 개안시킨 것이다.


 “한번은 깊은 산 속 계곡 근처에 갔을 때였어요. 작은 물웅덩이가 있는데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고 고요했어요. 그 물웅덩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마침 그때 아주 부드러운 미풍이 살짝 불어오면서 잔잔한 수면이 스르르 물결을 만들어내는데 그 순간 그분의 음성이 들려오는 걸 들었어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제까진 내 마음이 듣지 못한 것이었구나 하고요. 그 이후 촬영을 가면 신의 음성을 듣게 되곤 합니다.”


이쯤 되면 종교에 냉담한 이들은 뭔가 거북해지는데 실은 굳이 종교적인 색채를 떠나서도 그의 작품은 얼마든지 보편적으로 읽히고 해석될 수 있다. 존재의 의미를 묻고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어 공감하고자 하는 것은 많은 작가들이 추구하는 근원적인 자세일 터이니 말이다. 다만, 그의 자세는 조금 더 겸허하고 진지하며 확신에 차 있는데, 이는 굳은 믿음이 전제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이종만

 
그의 바다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저쪽에서 바라보는 이쪽과 이쪽에서 바라보는 저쪽의 차이는 무엇일까. 또한 이쪽과 저쪽의 경계는 어디인가? 다른 물음도 가능하다. 이쪽이 현실이라면 저쪽은 내세일진대 과연 현실을 통하여 내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바다사진은 하이키를 선택하면서 디테일이 생략되어 아주 희미하고 공허하기까지 하다. 가끔씩 등장하는 현실의 흔적이 없다면 그저 흰빛을 가득 품고 있는 아득한 공간이다. 아직은 멀리 보이는 작은 등대, 부표 같은 것이 등장해 여기가 현실세계임을 말해준다.


 “처음엔 저쪽에서 우리에게 하려는 이야기를 전하는 ‘바다, 저편에서’로 끝내려고 했는데 내세도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결국 보이지 않는 저쪽 세계도 현실로부터 희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여기로부터’를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종만
 

작가는 이번 바다 작업을 하면서 마음이 참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시리즈로 할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은 홀가분함이랄까.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담아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준비된 미래

 20대 젊은 시절에 그는 착실하게 직장에 다니며 인정도 받고 승진도 빨랐다. 그렇게 10년간 수산업협동조합을 잘 다니던 시절,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이대로 가면 난 어디에 가 있게 될까. 저 선배처럼 차장도 되고 직책은 높아지겠지.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 내 삶이 끝난다면 너무 허망하지 않은가?” 결혼을 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했던 그는 느닷없이 사진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고 직장에 사표를 냈다. 무모한 선언이었지만 사진과 인연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우리 사진사에서 이름도 쟁쟁한 임응식 이형록 선생이 한때 강릉에서 작품 활동을 했고 그의 형님이 그 당시에 사진을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암실을 들락거리며 사진을 곁눈질해왔던 것.


 
 “앞으로 10년만 열심히 하자. 그때는 사진가로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겠다.”

 

ⓒ이종만


 고지식하게 앞만 보는 그의 성격은 앞뒤 잴 것 없이 사진에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했고, 가족에겐 미안했지만 본인에게는 의미 있는 10년을 보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86년에 서울 백상기념관에서 유명작가들과 함께 8인전을 하면서 그의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진가가 된 것도 그렇지만 그로부터 2년 뒤인 1978년에 기독교를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처음엔 목회자가 되려고까지 했어요.”


 목회자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사진을 통하여 신의 섭리를 체험하면서 주변에서 “사진으로 목회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어쩌면 당시에는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사진가의 길이 준비된 미래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의 사진에 신의 섭리와 신비체험이 더해지면서 그의 풍경사진은 남다른 세계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진을 잘 찍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사진보다는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면서 역설적으로 사진에 있어 작가 고유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었다. 또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는 철학적인 풍경사진을 구사했다. 그는 이제 그가 왜 사진가여야 하는지, 사진을 통하여 무엇을 말할 것인지, 사진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한 답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이 그를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존재의 이유

 

ⓒ이종만

 
요즘 그의 사진무대는 대관령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다에서 산으로 다시 바다로, 분주하게 발걸음이 이어졌는데 이번엔 대관령 숲이라고 했다. 산과 바다의 절경이 빼어난 강릉에서 사는 사진가의 특혜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셈인데, 그는 대관령에서 소나무에 자주 눈길이 머문다고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아직은 내가 왜 대관령을 찍는지 확실하게 알지 못해요. 발길이 그곳으로 향해지긴 했는데 열심히 집중하여 찍다 보면 한 순간,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메시지가 확 다가올 것이라 믿어요. 그때까진 내가 할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을 다하며 기다려야지요.”


 

ⓒ이종만

 
막연하지만 알 것 같다. 아니, 그리 될 것이라 믿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작가는 여러 번 그런 체험을 해왔을 테니 말이다. 가능하면 촬영을 혼자 가는 이유도 그 메시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마음이 고요하고 조용해야 창조주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분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2014년에 “숲”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했는데, 그곳에서는 생명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관조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 신앙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그의 숲은 만물이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드러내며 생명력이 넘친다. 번듯한 나무만이 아니라 잡풀과 이끼와 넝쿨들이 서로 얽히고 덮어주고 감싸 안으며 생기를 내뿜는다. 그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 합세하여 공존하는 이치를 실천하고 있을 터이다. 그렇게 수도 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숲은 더 무성해졌을 테고 비옥하고 풍요로워졌음을 느낄 수 있다.

 

ⓒ이종만


그러나 이번 대관령 작업에서는 다른 메시지를 보내올 것 같다. 창세기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했던 것처럼 이번 대관령 작업만큼은 작가가 작업에 대한 부담감이나 의무감 없이 오로지 표현하는 즐거움으로 임하고 있으니 ‘보기에 심히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사실 저를 아끼는 분은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면 안 된다고 충고를 해주셔요. 무슨 말씀인지 알지요. 그러나 내 마음에 꽝하고 오는 섬광을 표현하지 않을 도리가 있나요. 이것이 나의 정체성이란 생각도 하고요.”


 풍경사진이 단순하게 풍경을 담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기운을 담는 것이라면 이종만 작가의 바다나 숲 사진은 그야말로 신의 숨결, 신의 음성, 신의 그림자를 담고 있으니 가장 태초의 순수한 기운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는 감상하는 각자의 몫이려니와 작가로서 그것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종만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붙일 수 있는 풍경사진을 내놓고 있는 셈이다.  

 

ⓒ이종만

이경률 중앙대 사진학과 교수는 이종만 작가의 작품집 “바다”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소리의 공명과 같이 스스로 드러나는 창발(創發)에서 생성된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의 내적 공명은 더 이상 의미로 설명될 수 없는 일종의 정신적 혼(魂)을 말하는데 그것이 삶의 일부로서 공통된 의식으로 수렴할 때 우리는 종교라고 하고 개인의 표현으로 드러날 때 예술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종만 작가에게 사진이 종교의 방편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한 그 접점을 수용하고 인정해줄 수 있을 듯하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맞는


 

이종만 작가


공자는 나이 70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게 되는 나이라고 말했다. 이는 법도를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되는, 즉 무한 자유로운 경지에 올라서는 상태라는 의미일 것이다. 수십 년을 마음을 갈고 닦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경지겠지만 이제 70대 중반에 이른 이종만 작가는 사진가로서 자유롭고 편안해졌다는 말을 했다. 사진의 법도를 초월하여 거침없이 자유로운 사진창작에 이르러 있다는 의미인 것 같다. 한편 공자는 나이 서른을 뜻을 세우는 나이라고 했는데 이종만 작가는 나이 서른에 확실하게 뜻을 세우고 사진가로 나서 칠십에 사진으로 자유로움을 얻었으니 공자의 생각과 일치하는 셈이다. 


그는 지금 대관령을 찍고 있고 앞으로는 또 무언가를 찍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순간의 울림에 충실히 답하는 사진을 찍고, 때가 이르면 전시를 하고 책을 내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욕심이 있다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가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지방에서 사진 선생님도 없이 독학으로 고생스럽게 사진공부를 했기 때문에 후학들을 위한 공간을 하나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강릉이 사진의 변방이 아니라 활발한 사진의 거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또한 때를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사진작업이든 사진문화운동이든 나무를 키우듯이 정성을 들이며 기다리면 때가 이르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이미 자연을 통하여 터득하고 있으니 말이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이종만 작가


해당 기사는 2019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