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홍구 | 공간을 탐구하다


강홍구 작가의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 작업실. 그는 이곳에서 사진을 프린트하고 그림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한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
작은 섬이지만 어의도는 그의 우주였다. 전남 신안군 앞바다, 어의도라는 섬에서 태어나 목포중학교로 진학하기 전까지 그가 뛰어놀던 갯벌, 거침없이 펼쳐지는 바다, 야트막한 야산은 그의 놀이터요, 그의 세상이었다. 갯벌에서 동네 친구들과 벌거벗고 마음껏 뒹굴며 큰 대자로 드러누워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유토피아를 뒤로 하고 생전 처음 육지로 나왔을 때, 그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공간에 대한 예민함이 싹텄던 것 같다.

육지로 나온 이후 강홍구 작가(1956- )는 자신 소유의 집을 갖게 되기까지 무려 35번을 이사했다. 그 35번의 이사를 일일이 기억하며 그 기억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었을 정도니 그가 도시 유목민처럼 떠돈 트라우마가 작지 않았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자주 이삿짐을 풀었다 싸고, 미처 짐을 다 풀기도 전에 다시 이사를 했던 경험이 그의 박스 작업에 고스란히 표출되는데, 이 설치작업은 이사한 순서대로 번호를 적고 메모와 그림을 그려 넣은 종이상자를 높이 쌓아 올린 것이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그의 20년 작업을 살펴보면 그는 일관되게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 인간이 욕망하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의 재개발지구이거나 부산의 산동네이거나 장소는 바뀌어도 그의 눈에 비친 공간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자본의 논리, 자본의 힘에 의해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과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풍자가 공통적으로 들어있다.

“내겐 문화충격이었어요. 그렇게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거환경도 그렇고, 강릉에 갔다가 마주한 해수욕장의 인파나 여의도에서 조우한 벚꽃놀이 인파 등, 어쩌면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나 놀이에 있어서나 저렇게 결사적일까, 낯설고 어리벙벙했어요.”

이는 하늘과 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깝고 확 트인 시야를 누릴 수 있는 섬에서 목포로, 그러다 느닷없이 서울로 공간이동을 단행했을 때 각오했어야 할 문제였는지 모른다. 값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넓은 공간에서 밀집된 대도시로 이주해온 그에게는 알레르기처럼 유난히 ‘공간’에 대한 예민한 반응이 나타났음직하다.

 


study of green, seoul vacant lot, changshin dong 4, 2019 ⓒ강홍구


〈뻘밭, 어의도〉, 2022 ⓒ강홍구


작가의 독특한 정체성
강홍구는 참 흥미로운 작가다. 그는 공간에 대한 소유개념이 희박한, 그가 “어의도 가는 길”이란 작품 제목으로 명기하지 않았다면 존재도 몰랐을 남쪽 바다 수천 개 섬 중의 한 곳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그러다 한 뼘의 땅이 엄청난 값으로 환산되는 서울에 편입되어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자본의 현장을 목격했다. 또한 목포교대를 졸업한 후 안정적인, 너무나 안정적인 직업인 초등학교 교사직을 대책 없이 집어던지고 서른이 다 되어가는 나이로 상경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홍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화가의 엘리트 코스를 마쳤으니 그 프리미엄을 누릴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이 또한 일찌감치 내던지고 사진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역이라 분류될만한 재개발 현장을 찍었지만 그 또한 스트레이트한 사진에 머물지 않고 덧칠하거나 이어 붙이는 방식으로 사진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며 사진과 그림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가 인생을 조금씩 알아가며 고민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막연히 가졌던 “죽을 때 후회하는 삶을 살지는 말자”가 불쑥불쑥 그를 선동하며 늘 기존의 것을 박차고 나와 맨땅에 헤딩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후회 없는 삶의 실체를 아직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런 삶은 아닐 거라는 회의가 생길 때마다 과감하게 전복을 반복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도달한 지금의 삶, 지금의 작업은 정반합의 ‘합’에 이른 것 같다. 물론 그 합은 언젠가 다시 도전을 받게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가장 최근의 전시인 2022년 7월, 서울 원앤제이 갤러리에서 보여준 《신안바다- 뻘, 모래, 바람》은 과거와 현재라는 시차를 사진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 구현해내고 있다. 그가 떠나온 곳으로부터 혹은 그가 내던진 것으로부터 멀리 돌아와 합일점을 찾는 그의 작업의 행보는 흥미롭다. 특히 여느 사진가와 다르게 여러 권의 에세이집을 출판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필력도 대단하다. 그가 세상을,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과 같은 책들은 그의 이미지가 어디서 기원하는지 답을 주는데,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이미지 작업에서 얻은 후기라기보다 이미지 작업을 하기 전 밑그림이란 생각이 든다.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본질을 꿰뚫고 그 속에 든 가식과 허위를 날카롭게 잡아내는 명석함이 그의 이미지 작업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말하자면 글(생각)이 이미지화되고 그 결과물이 다시 글을 불러오는 순환 작업인 셈이다.


 


만재도에서 2, 2021(김철성 촬영)









대형 프린터기와 카메라와 그림도구는 강홍구 작업을 가능케 하는 세 가지 도구다.



원흥동 작업실
강홍구 작가의 원흥동 작업실은 상업지구 빌딩의 8층에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고양시 원흥동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창릉천변 충적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는데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대단위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이란 설명이 보인다. 그동안 재개발지역의 면면을 작업해온 작가와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작업실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또한 공간에 대한 선택지가 없던 작가를 품어준 그나마 다행스런 장소다. 5년 전에 처음으로 본인 소유로 마련했다는 26평짜리 이 작업실은 동선을 제외하고는 온갖 작업 도구들로 꽉 차 있다. 책과 프린터와 그림 도구들, 작업 중이거나 완성된 작품들이 빼곡한데, 그곳에서 그는 촬영한 이미지를 프린트하고 아크릴로 채색을 하고 글을 쓰거나 음악을 듣는다.

“서울에 올라와 대학 1학년이던 1984년 말에 선배의 작은 화실을 인수한 것이 나의 첫 작업실이었고, 그 후 홍대 앞 차고를 개조한 작업실 등, 여러 곳을 옮겨 다녔어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무릎까지 물이 들어찼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빠지는 곳에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2001년에 불광동으로 왔는데 16년간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불광동 작업실에서 북한산으로 산책 삼아 슬슬 걸어 다니다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집들을 보았다고 말한다. 산자락에 기대어 위태로운 집 한 채를 짓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까. 심지어 집으로 통하는 계단이 바위를 쪼아 만든 것임을 보면서 경외심까지 생기더라는 것. 내 집을 갖기 위한 그들의 집념, 그 간절한 마음이 처절하고 찡했던 것은 어쩌면 작가도 집 한 채가 아쉬운 처지여서 공감 능력이 더했는지 모른다.

“오랜 시간을 살면서 하나하나 공들여 피땀으로 지은 집, 가족의 시간이 쌓인 그런 집들이 거대자본에 의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기가 솟구쳤어요.”

서울 은평뉴타운 개발지구에서 집 한 채에 대한 간절함을 목격하며 느낀 충격은 2011년부터 2년간 부산 산동네를 작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이 마구간으로 지은 매축지를 집으로 개조한 3평에서 10평 정도의 집, 일본인 묘지였다는 아미동에 들어선 무덤과 이웃한 집들도 있었다. 비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그나마 공간을 넓게 쓰고자 아예 대문을 열어놓고 사는 사람들,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공원처럼 초록이 보인다면 그건 묘지라고 했다. 더러는 무덤에 썼던 비석을 가져다 담벼락으로 이용한 집도 보였다.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동네, 아니 산 자가 죽은 자를 밀어내는 동네를 찍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단코 살아내야만 하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작가가 유난히 빈 집에 눈길이 머물고 사라지는 집에 애착을 느끼고 공터에 녹색을 채워 넣는 작업을 해 온 것은 삶의 다양성을 허용치 않고 획일화 시키는 음험한 돈과 권력에 대한 반감이었다. 개별적인 형태의 집을 밀어버리고 아파트로 획일화시킴으로써 생활의 방식도, 나아가 사람들이 꾸는 꿈도 단순화되어가는 구조, 그것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에 색을 칠하다
그는 서울에 살면서 자신이 바다를 그리워할 줄은 미처 몰랐다고 말한다. 서울의 아스팔트가 햇빛을 받아 반짝일 때 퍼뜩 그것이 개펄로 착시되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 늘 고향의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대도시의 주거 공간에 천착하던 그가 한편으로는 2005년부터 고향 작업을 지금까지 병행해오고 있는 이유다. 50년이 지난 유년의 기억 속 풍경과 지금 달라진 시공간의 간극은 실재인 사진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으로 완성시킨다. 그는 프린트 한 대형사진에 색칠을 하기도 하고 어구를 그려 넣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을 보여주는 사진에다 지나간 시간을 재현할 수 있는 그림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가 사진에 색을 칠한 작품을 발표한 것은 2010년 <그 집>시리즈부터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중성적이고 기계적이며 객관적인 척도 하는 매체인 사진” 만으로는 그의 감정을 다 이입할 수 없었다는 것. 작가는 그의 개인적인 느낌, 그 집마다의 개별화된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 사진에 그림을 결합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연세가 드시면서 봄이 되면 고향에 가고 싶어 하세요. 그래서 봄이 되면 어머니를 모시고 섬에 가곤 했는데, 야산을 일궈 애써 만들었던 밭이 묵정밭이 되고 빈집이 생기고 염전은 새우양식장으로 변해가는 걸 보면서 그 변화를 찍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에서 재개발지역을 찍을 때와 비슷한 심경이었죠.”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연민이 그의 고향 작업을 재촉했다. 특히 어렸을 적 해방공간이었던 ‘뻘’에 대한 추억이 강하게 그를 잡아끌었다. 어린 손도 중요한 노동력이었던 시절, 아버지의 눈에 띄면 저물도록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는 멍석에 곡식을 널고 소를 데리고 나가 풀을 먹이는 기본적인 일과가 끝나면 재빨리 뻘에 숨어들었다. 어린 날의 그에겐 해방공간이었다는 그곳, 기억 속의 그 아이를 불러내기 위하여 그는 그림을 그려 넣는다.

강홍구 작가는 내년에 신안군 작업으로 한 번 더 전시를 하고 나면 우리나라 해안의 포구를 찍고 싶다고 했다. 제주도의 바닷가 마을도 그의 촬영 리스트에 올라 있다. 제주도를 한 바퀴 걸어서 돌면서 바닷가 마을을 찍을 생각이라고 하는데, 그가 하고 싶어 하는 작업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전히 그의 마음에선 바다가 출렁이고 있음이 느껴진다. 어의도에서 촬영 공간을 넓혔을 뿐, 그의 심리적 공간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글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22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