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어떻게 그림이 됐는가? ②유형학적 사진의 오해와 진실

유형학적 사진의 오해와 진실
그림이 된 중성사진의 이해


오늘날 사진예술의 글로벌 트렌드를 들라면 우리는 단숨에 독일 유형학적 사진이라고 한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루프, 토마스 스트루트, 칸디다 회퍼, 엑셀 휘트 등 독일 출신 작가들이 세계적인 지명도를 가지며 그들의 작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유통되고 있다. 이런 유형의 사진들은 공통적으로 현실의 유사한 형태나 상황을 연속적으로 재현하면서 불특정 대상의 무표정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사진들을 언제부터인지 형식적인 관점에서 유형학적 사진(typological photograph)이라고 말한다.


 
ⓒPetra Wunderlich (1954) Fossa Degli Angeli, Italy, 1989 Gelatine silver print on baryta paper, 61x75. 2cm


그러나 이 용어와 개념에 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그들이 보여주는 유형학적 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을 활용한 그림(사진-그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작품들은 형식적인 관점에서 유형학적 사진으로 나타나지만 엄밀히 말해 유형학적 방식을 차용한 그림 즉 그림의 형태를 가지는 개념사진이다. 1990년대 이후 사진이 그림의 제작과정에서 실질적인 실행자(혹은 조형적 도구) 역할을 하는 사진-그림은 지금까지 조형사진 혹은 또 다른 객관성, 중성사진, 마이크로-레포트 등 작품의 개념적인 용어로 언급될 뿐 전 세계적인 유행으로서 유형학적 사진으로 언급된 적은 없다 – 실제 1990년 이후 출간된 사진예술에 관한 이론서들을 보더라도 오늘날 사진예술의 주요 경향으로서 유형학적 사진의 용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형학적 사진이 물론 특정 대상을 공통된 종류나 유형으로 분류하는 사진의 특별한 방식으로 지칭되어 왔지만, 오늘날 전 세계적인 글로벌한 용어로 소통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익숙한 모더니즘 미술과 그 형식적인 구조에 기인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가 언급하는 유형학적 사진이 작품에서 분명히 사진으로 출현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림으로 이해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우선 1950년대 이후 사진은 현대미술에서 점진적으로 선택 진화된 매체라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선택 진화는 생물의 진화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가장 안전한 방식을 선택하면서 진화하는 것을 말하는데, 현대미술에 활용된 사진은 바로 이러한 매체의 친화력을 배경으로 선택된 가장 탁월한 매체가 된다. 이때 사진은 예술의 실행 방식(modus operandi)에서 포토몽타주, 신체미술, 퍼포먼스, 설치 등 오늘날 예술의 최종 실행자가 된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1970년대 이후 “사진의 예술적 진화에서 예술의 사진적 진화”로 가는 역설을 보여준다.

1950년대 이후 현대미술에서 사진은 그 동결효과와 유물효과를 앞세워 특히 행위미술과 대지미술에서 최종적인 기록자가 되었으며, 조각의 확장이 설치가 되고 설치의 기록 역시 사진이 되어 시공간을 아우르는 재현 도구로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것이었다. 1970년대 텍스트-이미지의 추론과 관객의 사고-순환의 형태로 개념미술이 예술적 전략으로 선택한 매체가 또한 사진이었고, 1980년대 흔히 사진-그림, 사진-조각, 사진-비디오 등 포스트모더니즘의 탈 장르와 혼성 교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개물 역시 사진이었다. 이때 사진은 재생, 복제, 판박이, 대중 전파, 시리즈, 반복 등의 사진 고유의 특징으로 작가와 작품 그리고 그 독창성을 전복하는데 역설적으로 활용된다. 이와 같이 “사진은 모더니즘을 퇴행시키면서 예술의 기준을 정복한 것 같다”라고 언급한 뒤글라스 클림프(Duglas Crimp)의 말과 같이 사진은 사실상 20세기 후반 현대미술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사진이 현대미술을 지배하게 되는 결정적인 것은 1990년대 초 데생, 드로잉, 조각 등 오랫동안 전통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그림의 영역 특히 역사적 사실과 사회적 현상을 재현하는 역사그림에서 화가들이 물감이나 잉크 대신 사진의 절대 객관성(objectivité)과 반박할 수 없는 사실성(ça a été)을 예술적 실행 도구로 도입한 것이었다. 이때 사진은 더 이상 상징-이미지(symbol-image)의 소통 매체가 아니라 단순히 현실의 사실주의 즉 현실의 사실(fact)과 그 존재론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지표-이미지(index-image)가 된다.  

 


ⓒJoerg Sasse (1962) 1546, 1993 Chromogenic colour print, 137x200cm



ⓒJoerg Sasse (1962) 7341, 1996 Chromogenic colour print, 93x150cm


그래서 이러한 종류의 작품을 1980년대 말 장-프랑수아 슈브리에(Jean-François Chevrier)는 처음으로 그림의 형태를 가지는 사진 혹은 사진으로 된 그림이라는 의미로 사진-그림(Forme-Tableau)이라고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사진-그림은 “그리는 행위 자체가 중재하지 않고 회화적 모델을 품고 있는 사진적 형태를 지칭하는데” 그것은 사진 매체의 순수 기록과 그림의 형태가 혼합된 일종의 조형사진으로 “또 다른 객관성(un autre objectivité)” 혹은 “중성사진(photographie en neutre)”이라고 한다. 이럴 경우 작가는 외형적으로 사진가로 보이지만 개념적으로 오히려 화가나 조각가가 되며 작품은 합법적으로 그림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사진-그림은 개념미술의 한 형태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진이 지시하는 상황을 사회적 문화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또한 이와 같은 소통 메시지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해 왔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1970년대 이후 개념미술의 구성에서 사진은 더 이상 사진 그 자체의 미학적 메시지나 상징적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오로지 예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략적인 도구로 활용된다. 마찬가지로 사진-그림에 나타난 사진 역시 전통적인 역사그림이나 풍속화와 같이 단순히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의 단면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조셉 코주스(Joseph Kosuth)의 세 가지 의자에 설정된 의자 사진의 역할은 19세기 중엽 문화유산 재건축을 위한 에드와르 발뒤스(Edouard Baldus)의 아카이브 사진과 같은 것이며, 토마스 루프(Thomas Ruff)의 익명의 초상사진이나 장-뤽 물렌(Jean-Luc Moulène)의 무기력한 사진이 보여주는 일상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이미 1980년대 초 캐나다에서 제프 월(Jeff Wall) 혹은 프랑스에서 장-마크 뷰스트망트(Jean-Marc Bustamante)와 같은 작가의 그림에서 이미 그 첫 출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사진-그림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주축이 되어 곧 국제적 경향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특이 역사적으로 1989년에 열린 두 전시 파리에서 〈또 다른 객관성〉 그리고 스투트가르트에서 〈표명적 전시〉는 당시 사진으로 진화된 그림의 새로운 경향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또한 이듬해 1990년 그랑프리를 수상한 베른트-힐라 베허(Bernd and Hilla Becher) 부부의 유형학적인 작품은 개념미술의 영역에서 이해되는 그림이며, 이때 그들은 합법적으로 화가가 된다. 그들의 작품은 사진의 유형학적 방식을 도입하면서 전통적 그림의 패러다임을 바꾼 이정표로서 현대미술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열었고 사실상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진화된 중성사진의 이론적 원형으로 간주된다. 이후 많은 젊은 화가들이 그들이 제시한 새로운 길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사진-그림은 일반 미술사조와 같이 세계적인 예술 운동으로 진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국가의 역사적 특징과 문화적 취향에 따라 혹은 각 그룹의 내적 특징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다변화된 양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독일에서 베허 부부를 중심으로 토마스 루프, 토마스 스투르트(Thomas Struth),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eas Gursky), 악셀 휘트(Axel Hütte), 캔디다 회트(Candida Hötte), 조르그 짜스(Jorg Zasse) 등 소위 뒤셀도르프(Düsseldorf) 학파에 속하는 작가들은 그들의 전통적 사진 들 중 하나인 20세기 초 아우구스트 잔더의 초상사진과 랭그 패취의 신 객관주의에 나타난 유형학적 방식을 그림에 도입한다.

캐나다에서 제프 웰(Jeff Well)이 19세기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사진과 비디오로 재구성하면서 오늘날 현대 화가의 드로잉은 전통적 그림의 화폭에 사진을 그대로 차용하는 사진-그림이라는 것을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장-마크 뷰스트망트, 장-뤽 물렌, 장-루이 가르넬(Jean-Louis Garnelle), 수잔 라퐁(Suzanne Lafont), 파트릭 토자니(Patrick Tosanie) 등의 프랑스 작가들이 보여주는 사진-그림은 독일의 엄격한 유형학적 방식과는 달리 1인칭 마이크로 레포트(micro-report)에서 기록된 일상의 아무 장소와 불특정 대상 그리고 무의미한 사건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아마도 예술적 진행 과정에서 탈-형식과 무질서를 선호하는 프랑스 작가들의 독특한 개인적 시각이나 극단적 에고이스트 때문일 것이다.

 


ⓒAndreas Gursky (1955) Doorman, Passport Control 1982 (2007) Inkjet print, 43.2x52.5cm

이와 같이 그림의 형태를 가지는 사진-그림은 각 국가 혹은 한 국가 안에서도 각 개인과 각 그룹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굳이 유형학적 사진을 사진-그림의 공통분모로 말하자면, 베허 부부와 그 뒤를 잇는 뒤셀도르프 학파의 작품에 시리즈로 나타나는 경직된 유형학적 사진들 예컨대 폐 광산, 익명의 초상, 빌딩, 아파트, 관공서, 광장 등의 삭막한 도시 풍경들은 프랑스 작가들의 사진-그림에서 나타나는 구토, 쓰레기, 음식물, 공사장 등 현기증 나도록 무질서한 일상의 시시콜콜한 것들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질서한 장면들을 아무도 유형학적 사진이라고 하지 않는다. 독일에서 사실 유형학적 사진의 원조는 전통적으로 베허 부부가 아닌 아우구스트 잔더이며, 이러한 전통은 베허 부부의 뒤셀도르프 학파에 의해 확대되고 계승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베허 부부의 유형학적 사진은 새로운 예술의 창안이라기보다 독일 전통사진의 계승자로서 의미가 더 클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는 유형학적 사진이 형식적인 관점에서 오늘날 베허 부부를 중심으로 일부 독일 작가들의 공통된 재현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또 유형학의 역사적 배경을 갖춘 독일의 독특한 재현 임에도 불구하고, 유형학적 사진을 유행처럼 추종하면서 그것이 마치 전 세계적인 예술적 사조로 착각하고 있지 않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오늘날 예술적 주류로 생각하는 유형학적 사진에 두 번째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Andreas Gursky (1955) Paris, Montparnasse, 1993 (before 2003)


마지막 문제제기는 사진을 이해하는 방법론에 있는데 유형학적 사진의 올바른 이해는 근본적으로 장면이 함축하는 해석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 지시하는 조짐에 있다는 것이다. 사진-그림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 의미 없는 일상이나 어디에나 볼 수 있는 도시 풍경을 보여주면서 더 이상 부가적인 설명과 분명한 주제를 달 수 없는 무언의 지표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상징과 지표는 다르다. 우리가 신문 기사를 읽을 때와 시를 읽을 때 그 문맥을 이해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듯이 사진-그림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대중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장면과는 분명히 다르다. 사진-그림의 이해는 주체-장면의 관점에서 장면을 해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징후로부터 주체-작동자의 개인적인 의도를 유추하거나 주체-관객의 능동적인 추리에 있다. 왜냐하면 작가의 예술적 의도는 오늘날 전파 매체의 전유물이 된 집단의 결정적 사건-순간과 대중을 향한 보편적 소통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그림은 언제나 밋밋한 무광의 현실로 무의미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유형학적 사진에서 제시된 사진은 무엇을 지시하고 또한 어떤 예술적 가치를 가지는가? 우선 사진-그림은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하거나 결정적 사건으로서 글로벌 이슈를 목적으로 하는 미술이 아니라 흔히 관객의 사고-순환을 통해 상황적인 혼돈을 야기하는 개념미술이다. 여기서 개념적인 도구로 활용된 사진은 조셉 코주스가 하나의 의자를 세 가지로 정의하면서 사진으로 보여준 의자와 같은 것인데 이때 사진은 시각적인 존재의 확인 이외 전혀 의미를 갖지 않는 중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사진-그림의 장면은 사진으로 나타난 의자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진-그림은 전통적인 유형학적 사진과는 전혀 다른 예술적 의도를 가진다. 사진의 역사에서 유형학적 사진은 원래 동식물의 종을 유형별로 보여주면서 과학적 통계와 그 증거로서 오로지 시각적 확인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과학적 자료로 활용된 사진들은 총체적인 결과로서 논리적인 해석을 동반한다. 만약 독일 유형학적 사진을 과학적 도감으로 이해한다면 궁극적으로 베허 부부의 폐 광산 시리즈는 버려진 폐 광산에 대한 지리적인 장소의 확인으로 해석되고, 토마스 루프의 익명의 초상사진은 잔더의 사회학적 관점이 투영된 오늘날 인간 군상의 도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마틴 파의 관광 시리즈는 아마도 오늘날 산업화된 관광산업의 고발로 해석될 것이다. 한국에서 한때 베허 부부의 작품을 모델로 유형학적 도감 사진전이 유행되었는데 당시 그 의도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단순히 인본주의, 환경보존, 생태계, 반-세계화와 같은 글로벌 이슈를 암시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사진-그림의 근본적인 의도는 그림의 재현대상으로서 오랫동안 집단의 이슈로부터 소외된 일상의 무의미한 존재들 즉 철학적으로 말해 현실의 가장 무도회(모의 simulation)에서 원본 없는 존재의 진실(시뮬라크르 simulacre)이다. 프랑스 작가 장-룩 물렌의 사진-그림이 보여주는 일상의 무질서한 단편들 예컨대 빌딩, 자동차, 변두리, 아파트, 도시의 광장, 거리의 구석진 곳 등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일상적인 것들은 의미의 수수께끼로 소위 반-예술(anti-art)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오랫동안 시간의 단절로서 결정적 사건-순간 패러다임에 대한 전복임과 동시에 일상 속으로 침수하는 1인칭 마이크로-비전(micro-vision)으로 이해된다.

결국 우리가 유형학적 사진이라고 말하는 사진-그림은 일상에 내재된 시간의 지속을 드러내면서 더 이상 의미의 편견을 갖지 않는 중성사진이 된다. 이때 중성은 사진의 객관주의가 아니라 작가의 모든 주관적인 번역을 완전히 철수시키면서 주체-작동자(sujet-operator)의 의도가 문화적 제로 단계에서 의미의 중립을 지시하는 개념적인 중성을 말한다. 우리가 장면을 보고 즉각적으로 판단하는 편견과 선입감의 대척점에서, 언제 어디서나 산재하는 건축물과 장소, 삭막한 도시와 변두리 텅 빈 땅, 거리의 판박이 얼굴 그리고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의 시시콜콜한 일과 진부한 대상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각자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애착과 존재의 진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곧 또 다른 감동의 애수로서 무의미의 파토스(phatos de non-sens)가 된다.

주요 참고자료
도미니크 바케, 『현대 조형사진론』 (이경률 역), 사진마실, 서울, 2006.
이경률, 「현대 중성사진과 기록의 미학」, 『현대사진영상학회』 11호, 현대사진영상학회, 2008.
Chevrier Jean-Francois, Une autre objectivité, Idea Books, Paris Milan, 1989.
Poivert Michel, La photographie contemporaine, Flammarion, Paris, 2003.

이경률(사진이론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
프랑스 투르대학 예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예술사 석사 및 팡테옹 소르본 파리 제 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진은 무엇을 재현하는가>,<철학으로 읽어보는 사진예술>,<현대미술 사진과 기억>,<현대 사진미학의 이해> 등 다수의 사진 이론서를 저술했고, 필립 뒤봐의 <사진적 행위>와 도미니크 바케의 <조형사진론>을 번역했다. 사진이론가이자 연구자로 후학양성과 집필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글 이경률 교수 이미지제공 Städel Museum
해당 기사는 2017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