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 구본창

참 오랫동안 만나왔는데도 참 한결같다. 경기도 분당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오늘도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며 조수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우리 일행을 새로 지은 작업실 지하층부터 3층까지 골고루 안내하며 최근 작업을 보여주었다. 그 사이에도 계속되는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을 내놓는다.
5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랬다. 조용하게 몇 가지 일을 동시에 빠르게 진행하면서 작은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한 사진가, 구본창의 일상이다.


 
탈의기 08, 1988 ⓒ구본창
 

“사진 새시좌전”으로부터 30년
한 작가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에 가 닿을까. 작가에게 작품은 어느 한 순간의 돌출이 아니라 출생 그 순간부터 축적되어온 결과물이겠지만 오늘의 구본창 작가를 있게 한 여러 가지 장면들 중 1988년 “사진 새시좌전”은 의미가 깊다. 1985년에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신진작가로서 아직 전통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한국사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이 전시는 참여 작가 8명이 모두 해외유학파였고 새로운 사진표현방식을 추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참여 작가이면서 기획자로서 전시를 주도한 구본창 작가는 이 기획전을 시작으로 30년 동안 국내외에서 숱한 전시를 기획하고 참여하는 일인다역의 맹활약을 펼치게 된다.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였다. 서울이 처음으로 집중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는 경험을 했던 중요한 시기였고 이런 경험은 우리에게 지구촌에서 자신의 좌표를 읽어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때 구본창 작가가 한국의 사진이 세계를 향한 문을 열고 나가야한다는 자각을 일깨웠고 1990년대부터 점차적으로 해외진출을 모색하고 실행했다. 그는 활발하게 국내외에서 한국작가들의 기획전을 펼쳐 보이며 한국사진의 지평을 넓히는데 열성을 다했는데, 그 결과 많은 젊은 작가들이 해외로 진출하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는 담력을 키울 수 있었다. 성화에 불을 붙이면서 올림픽이 시작되듯이 그는 마침 한국사회가 경제적인 부를 일구며 세계로 눈을 돌리는 기운이 무르익어갈 때 한국현대사진에 불을 지폈다.  
“사진 새시좌전”은 세상은 넓고 사진의 영역도 넓음을 알린 도화선이었고, 그 중심에 섰던 구본창 작가의 향후 30년 활동을 짐작할 수 있게 한 단초였다.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하고 전시를 기획하고 학교에서 강의하고 가장 자주 해외에서 전시를 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사진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쌓았다.  


상처에 대한 연민
사실 구본창 작가처럼 다양한 작품을 내놓는 작가는 흔치 않다. 대부분 한두 가지 소재로 평생작업을 하는 경향인데 반해 구본창 작가는 다양한 소재를 갖고도
일관된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초기 도시 스냅부터 신체, 정물, 달항아리 같이 어떤 대상이든 그의 눈길과 손길을 거치면 구본창 특유의 미감이 풍부한 작품이 탄생했다. 그 일관성은 대상에 내재한 상처와 그것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다. 작가는 작업 초창기부터 스크래치(작가는 상처 대신 스크래치라고 말했다.)가 난 것,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거나 강하고 직접적으로 어필하지 않고 숨어있거나 은유적인 것에 마음이 가더라고 말했다. 독일 유학 시절의 아주 초기 사진부터 그런 조짐을 보이는데 천으로 덮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이지 않는, 또는 반쯤 커튼에 가려져 있는 풍경 같은 것들, 그가 눈길을 주지 않았으면 어디로 굴러다니다가 사라졌을지 모를 작은 물건들이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을 포착했다. 그는 왜 그런 것들에 자꾸 눈길이 머무는 걸까?

 

“어린 시절부터 깨진 사금파리, 떨어진 꽃잎, 그림이 예쁜 달력, 수가 놓인 헝겊 같은, 이미 용도가 다한 것들에 아쉬움이 남아 책상서랍에 보관하고 그랬어요.”


쓸모가 없어졌다고 해서 쉽게 버리지 못하는 그의 성품은 시간성에 대한, 짧은 찰나의 순간에 대한 아득한 연민으로 이어졌고, 이윽고 그런 것들에게 영원한 시간성을 부여하는 작업으로 나타났다. “굿바이 파라다이스”에서 보여준 곤충표본도 짧은 생을 마감하고 방부 처리되어 시간을 연장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애틋함이고, 길거리를 지나며 흔히 볼 수 있는 흰 벽면의 스크래치를 마치 동양화처럼 보여준 “화이트 시리즈”도 그 벽 앞을 무심코 지나쳤을 수많은 사람과 그 시간의 흔적을 문신처럼 새기고 있는 벽에 대한 소소한 애정일 터다.
심지어 날마다 쓰는 비누조차 그냥 버리지 못하고 작품화 했다. 사람의 손이 수없이 스쳤을 비누는 사람의 손에 의해 닳고 닳아 처음과는 다른 형태로 남겨지는데 작가는 그런 비누에도 마음을 준다. 그렇게 주변에 사소하고 일상적인 물건들. 스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작업의 소재로 삼던 작가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탈(mask)에 이어 달항아리 청화백자 등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품고 있는 소재에 마음이 갔던 것은 초기부터 일관된 흐름이지만 그 대상이 일상의 소소한 것들에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확장되었다.


 
RH 03 BW, 2014

OM 16, 2014



시간을 품은 것들에 대한 애정
달항아리 사진은 사진가 구본창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시리즈로 남을 것 같다. 그는 일본에서 우연히 영국 도예가와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함께 찍은 사진을 본 순간, 그것이 운명적 만남임을 예견했다. 영국까지 건너간 우리의 달항아리는 그가 늘 추구하던 시간성과 예술성 그리고 스토리를 갖추고 있었다. 그 이후 그는 각국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달항아리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일본, 유럽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여러 박물관과 개인 소장자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정은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백자시리즈 사진책에 세계지도를 그려 촬영장소를 표시했을 정도로 길고 집요했다.

 

“책을 낼 때는 열여섯 군데였는데 지금은 그 숫자가 더 늘었어요. 그런 보물을 순순히 보여주고 사진을 찍게 할 리가 없으니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접촉하고 방법을 제시하여 성사시키는 과정이 오래 걸렸고 어려웠어요.”


워낙 섭외가 어려웠지만 사실 그 다음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촬영의 기술적인 선택과 예술적 표현이 합일을 이룬 후 다시 작가의 꼼꼼한 눈으로 프린트 질감과 색감과 액자까지 도공이 도자기를 완성한 순간보다 더 아름답고 완벽한 달항아리를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런 과정이 공감대를 형성하는지 달항아리 사진은 구본창 작가를 좋아하는 소장자들이 가장 갖고 싶어 하는 작품이 되었다.
 

“누구나 문화재를 소장할 순 없잖아요. 그렇지만 아름다운 문화재를 소장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고, 그런 마음을 달항아리 사진이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욕망하는 이유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랜 시간을 품은 아름다운 문화재를 곁에 두고 감상하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라면 최고의 작가가 바라본 시선으로 감상하는 사진작품 속 달항아리가 오히려 더 큰 감흥을 불러올 수 있을지 모른다.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와 광선을 선택한 작가의 안목이 우리에게 잊혔던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다시 조명해주었다.
달항아리를 잇는 최근의 작업 중 한 가지는 황금유물이다. 달항아리 촬영이 인연이 되어 해외 여러 박물관을 다니면서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는 유물을 많이 접하게 되었고, 가장 권력적이고 욕망적인 황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황금과 관련된 장소들과 인연이 닿았다. 특강으로 페루 리마에 가게 되었을 때는 마침 그곳에 황금박물관이 있었다. 그는 지인들을 동원하여 박물관 측을 설득, 잉카시대의 황금을 찍게 되었다. 지금은 촬영한 결과물을 여러 가지로 프린트하며 효과를 검증하고 있고 액자선택에도 고심을 하는 단계지만 시험 삼아 제작해 놓은 몇몇 황금유물사진을 보면서 어떤 대상도 구본창 작가 앞에 서면 세련되고 아름다워지는구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영야류 09, 2002
 

최근에 탈북자 작업 중
의외였다. 고요한 정물이 주된 오브제였던 작가가 최근 탈북자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사람 사진을 발표하지 않았던 터라 더구나 탈북자라면 시사적이고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생각이 먼저 떠올라 이전 작업들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동안 촬영한 열 명 남짓한 탈북자들을 도록으로 만든 샘플을 보았다. 한 면에는 탈북자의 인물사진이, 그 대면에는 그 탈북자의 고향을 구글 지도에 표시한 사진이 배치되어 있었다.

 

“사실 처음엔 탈북자 인물보다 그들이 북한에서 갖고 내려온 것들, 이를테면 고향의 흙이라든가 가족사진이라든가 소지품을 찍으려고 했어요. 그러나 탈북과정이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고 행여 남은 가족에게 해가 될까봐 신분이 표시되거나 어떤 단서가 될 물건은 아예 가져올 생각조차 못했음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고향에 가족을 두고 온 경우에는 본인의 얼굴사진도 찍지 않으려고 해요.”


러시아에 노동자로 갔다가 기한이 되어 북한으로 돌아가게 된 한 노동자는 북한에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을 쉴 수가 없어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탈출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에 정착하고 숨을 돌리고 나니 이번엔 북에 두고 온 가족이 걱정되어 마음이 좌불안석이었다. 가족이 함께 탈북한 경우에는 카메라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뒷모습이나 그들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은유적이어도 충분히 탈북자들의 고뇌와 힘든 결정 뒤의 무거운 마음과 강인해 보이는 의지 등이 읽힌다.
 

“스토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탈북자도 나의 이전 작업과 맥락이 통하는 것 같아요. 사실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던 중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을 읽었거든요. 체르노빌 사건이 난 후 돈과 보드카를 많이 준다는 말에 멋모르고 자원하여 체르노빌에 들어가 원전사고 뒷수습을 했던 남자들이 그 후 서서히 나타나는 피폭증상으로 죽어가면서도 가족들과 작별의 키스조차 감염될까봐 못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 와중에 탈북자 뉴스를 보면서 뭔가 나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십중팔구 가족과 작별의 포옹도 하지 못하고 황망히 떠나왔을 그들. 상처투성이일 그들의 내면을 작가는 그의 특유의 시선으로 부드럽고 조용하고 세심하게 포착하여 탈북자들이 내놓고 밝힐 수 없는 숨죽인 아픈 사연을 전달해준다.
작가의 상처에 대한 연민이 가장 의미 있고 적합한 대상을 만난 셈이다.


 
김OO, 2017


김OO, 2017


4월 밀라노, 12월 국제갤러리에서 전시
구본창 작가는 남보다 세 배 이상 일했으니 지난 삶에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 2018년 스케줄을 보면 세 배 이상도 겸손의 말임을 알 수 있다. 1년 내내 전시 중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전시스케줄이 꽉 차있다. 3월에는 대신증권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갖고 4월 11일에는 이태리 밀라노 수족관 건물에서 물을 소재로 한 작품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진 새시좌전 30주년 기념전도 준비 중에 있고 12월에는 국제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중간 중간에 기획전들이 들어 있어서 그의 전시는 거의 연중무휴다.

 

“사진가가 된 운명에 감사해요. 내가 가진 감정을 사람들과 같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해요. 내 사진이 위로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정말 행복해지지요.”


사진가로 살아가면서 힘들고 외로운 순간이 없을 수 없고 실은 그 외로움이 없었다면 작업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그는 ‘쓸쓸함에 기대어’ 작업을 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쓸쓸하고 외롭지 않으면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을까. 외로움과 슬픔, 쓸쓸함이 힘이 된다는 것을 그는 아는 것 같다.
 

“하루 종일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고 많은 일을 처리하며 지내기 때문에 가능하면 주말에는 혼자의 시간을 가져요.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게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일이거든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오브제에 대한 관심에서 상처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 이르기까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미적 탐구는 바로 그의 외로움이 바탕이 되었다.
 

“아직도 내 안에서 더 나올 것이 있다는 사실이 좋아요. 작업하고 싶은 테마가 아직도 많이 있다는 것, 작가로서 행복이지요.”









구본창 작가의 스튜디오 내부


이제 60대 중반이 된 작가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분당 이매동에 있던 작업실 건물 뒤에 비슷한 크기의 4층 건물을 마련하여 최근에 오픈한 작가는 새 건물에는 작은 엘리베이터를 놓았다. 더 늙으면 혹시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질까봐 미리 대비했다는 것. 아직은 작업에 열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지만 앞으로 두 건물에서 사진후배들에게 유익한 일들을 어떻게 펼쳐나갈까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공간은 마련하였으니 그곳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이 자신이 해보고 싶은 마지막 프로젝트가 되리라는 것이다.

 

“사실 사진가로 평생을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젊은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겸손해라. 그리고 오래 버텨라.”


아무리 재능 있는 작가라도 잠깐 반짝하고 말면 그뿐이다. 재능 다음에 노력이 있어야 오래 가고 오래 작업을 해야 오래 남게 된다. 그는 너무 빨리 승부를 보려고 하지 말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런 말들은 아마 작가가 젊은 날에 자신에게 했던 말일지 모른다. 그렇게 오래 견디고 버티며 몇 배 노력을 했기 때문에 오늘의 구본창 작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오르막길 초입에 위 아래로 쌍둥이처럼 선 두 건물을 보며 생각했다.
유난히 사라져가는 것들에 연민과 아쉬움이 컸던 작가가 사라지지 않을 ‘무엇’을 저 건물에 남기려 하고 있구나 하고. 그의 아름다운 계획이 한국 사진을 위하여 꼭 이루어지기를 그리하여 구본창이란 이름이 오래도록 남기를 응원한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해당 기사는 2018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