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남도의 인문학적인 다큐멘터리 사진, 오상조


“천불천탑 사진문화관” 개관기념전
오상조 명예관장의 “운주사”



전남 화순 운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천불천탑 사진문화관”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사진문화관 명예관장 오상조 교수(광주대학교)가 30여 년간 촬영해온 사진작품 “운주사”를 기증, 개관기념전시가 열리고 있다. 오상조 작가가 오랜 세월 운주사를 촬영한 인연이 올봄 번듯한 사진문화공간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불가에서 말하는 연(緣)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오상조 작가와 운주사, 그리고 사진문화관의 탄생에 얽힌 사연을 듣고 바라봐서 그런지 1, 2층 전시실을 꽉 채운 대형 흑백사진 속 돌부처도 언뜻 빙그레 웃고 있는 듯이 보였다.

 

ⓒ오상조


언제 만나도 참으로 여일하다. 오상조 관장을 알게 된 지 30년이 넘었건만 조금씩 세월의 무게만 감지될 뿐 바람 불고 비 내리고 눈을 맞아도 늘 그 자리 그대로인 운주사 돌부처처럼 느리고 순한 억양과 순박한 웃음과 은근한 인간미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의 남도 작업은 그러한 은근과 끈기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필름카메라와 8X10인치의 대형카메라를 놓지 못하는 그는 사진도구의 선택 뿐 아니라 사진의 주제에서도 수십 년간 일관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의 사진작업은 그가 평생 몸담아 살아온 남도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는 그 한 가지 일이었다.


남도사람들로 시작


 

ⓒ오상조


오상조 관장은 어릴 때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을 정도로 오지인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자랐다. 지금은 보기 어려워진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관혼상제를 보며 자랐고 서울에서 사진학과 학생으로 공부할 때도 방학에 내려오면 소박하게 살아가는 마을사람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곤 했다. 그의 흑백사진 속 마을사람들은 100년 전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남도사람들의 원형을 보여준다.


마을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지거나 상을 당하면 그것을 촬영했고 마을사람들의 순박한 일상도 살뜰하게 기록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그 원형을 찾아 청학동 사람들을 찍기 시작했고 청학동 작업이 끝나자 사람처럼 쉽게 변하지 않고 꿋꿋한 마을 앞 당산나무에 눈길이 갔다. 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보다 더 오래 마을을 지키며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당산나무와 장승을 찍으면서 그는 자신이 사진가로서 동시대의 삶과 문화의 흔적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끝까지 갖고 가야 할 주제가 바로 남도의 정서를 대변하는 남도의 문화라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찍은 사진을 살펴보면 나의 사진 성향은 사회고발적인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문화적인 다큐멘터리입니다. 그것이 내 성격에 맞아요.”
 

​ⓒ오상조


오상조 관장이 남도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82년 전주대학교에 강사로 나갈 즈음이었다고 한다. 전주대 박물관으로부터 전라북도 내에 국보와 보물을 촬영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자료를 찾아가며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문화재의 90%가 불교유적이었다. 익산미륵사지 탑부터 시작하여 태봉사 삼존불을 찍을 때였다.

 
“삼존불의 크기가 아주 작거든요. 그것을 찍은 후 암실에서 전지작업을 할 때였어요. 작은 삼존불이 인화지 위로 서서히 커다랗게 상이 살아나오는 순간, 마치 오래된 석불이 환생하는 느낌이랄까, 묘한 충격과 환상에 빠졌어요. 그 환상이 사찰과 석불상 사진을 찍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1년간의 문화재 작업이 끝나고 다음해에는 구교, 신교의 유물 유적을 찍어달라는 의뢰를 받아서 전라북도 안에 있는 주로 가톨릭의 유적을 찍게 되었다. 명동성당 못지않은 역사를 가진 완주 되재성당, 나바위성당, 전주 전동성당, 순교자들의 흔적 등을 촬영하면서 그는 문화적인 사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운주사와 깊은 인연


 

​ⓒ오상조
 

전주에서의 경험을 뒤로 하고 광주대학교로 옮겨온 1984년에 광주에서 가까운 화순의 운주사에 가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그곳에 마음이 끌렸다. 아직은 운주사가 잘 알려지기 전이라서 모든 게 다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사람의 손길이 크게 미치지 않은 경내에 석탑과 석불상이 처음 조성된 시절의 모습 그대로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아예 도시락을 싸갖고 운주사에 가서 사진도 찍고 새소리를 들으며 책도 읽고 운주사 와불처럼 벌렁 드러누워 흘러가는 구름도 바라보며 그곳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엔 35mm 카메라로 석불의 얼굴 위주로 찍다가 나중엔 너무 가벼운 카메라로 찍는다는 게 미안한 기분이 들었어요. 제대로 연장도 없었던 시절에 자연환경에 맞추어 크고 작은 석탑과 석불을 만든 석공들의 노고와 정성을 생각하니 디테일이 세밀한 대형카메라로 더 정성껏 찍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지금 돌이켜봐도 거의 아무도 오지 않는 운주사에서 내 마음 가는대로 자유롭게 작업하고 명상에 잠겼던 그 시간이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사진가가 행복한 마음으로 찍었으니 그에게 사진을 찍힌 석불 또한 평화롭다. 전시 중인 63점 사진에 나타난 운주사의 석불과 석탑은 천불천탑의 전설에 걸맞게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다. 긴 세월이 석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심지어 눈 코 입조차 사라진 밋밋한 평면으로 만들었을지라도, 몸의 한 구석이 허물어진 채 다른 석불의 어깨에 간신히 기대어 서있을지라도 석불들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천연스럽고 편안하다.

 
“내 사진철학의 바탕은 인연과 집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광주로 오는 바람에 운주사와 인연이 되었고 집념을 갖고 열심히 촬영을 다니다 보니 아예 거처를 광주에서 화순으로 옮기게 되었어요. 그리고 화순에서 살다보니 구충곤 화순군수와 인연이 닿아 생각지도 않게 운주사 앞에 사진문화관을 개관하게 되었어요. 인연과 집념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불가에서 말하듯 모든 게 인연입니다.”


운주사 앞에 천불천탑 사진문화관 개관

 

운주사 입구에 개관한 화순의 천불천탑사진문화관 전경
 

오상조 관장은 운주사를 열심히 오가다가 그로부터 10여km 정도 떨어진 화순군 도곡면으로 아예 이사를 했다. 전원생활도 즐기고 나중에 집터에 작은 도서실을 갖춘 갤러리를 지을 요량이었던 것. 그런데 마침 운주사 앞에 운주사 유물박물관을 목적으로 짓다가 중지된 건물의 활용방안을 찾던 화순군수와 인연이 닿아 그 건물을 사진문화관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올봄 완공과 개관을 보게 된 것이다. 차량 270대 이상 주차 가능한 넓은 터에 480평 규모의 2층 건물에는 전시실 두 개를 비롯하여 수장고와 아날로그 흑백용 암실과 디지털 출력실, 사진도서관, 영상실, 카메라 옵스큐라실, 작은 카페 등이 들어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으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애초에는 운주사의 유물을 전시하려고 짓기 시작한 건물이라는데 첫 계획은 빗나갔지만 운주사 사진으로 개관전시를 하니 나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주사가 나를 부른 것 같아요.”



불천탑사진문화관 내부 로비



제1전시실 내부

 

1년 반 후에 학교에서 정년퇴직하면 사진문화관의 콘텐츠를 풍부하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오상조 명예관장은 “이 공간을 통하여 화순군민들이 즐겁게 문화를 누리고 사진가들에겐 암실작업도 하고 세미나를 할 수 있는 공간 제공을 하면서 장차 우리사진을 해외에 내보내는 전초기지가 되도록 해볼 작정”이라고 포부를 밝힌다.


중앙대와 동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후 수십 년간 교육현장을 지켜온 그는 사진문화관의 운영을 통하여 사진교육과 사진문화발전에 헌신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오래 된 타이틀은, 끝까지 오래갈 타이틀은 역시 ‘사진가’이다.


남도의 독특한 정감과 문화를 남기고 싶어


 

사진가 오상조


사진가 오상조는 그동안 “한국의 석상” “청학동 운주사” “한국의 미” “당산나무” 등 모두 13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사진집 “운주사” “청학동 사람들” “당산나무” “남도사람들” 등을 출간했다. 그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포착해온 ‘전통의 미’는 비단 남도의 것만이 아니라 한국의 미를 바탕하고 관통하고 있다. 사람이었다가 나무였다가 돌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작가가 어려서부터 몸에 밴, 아니 원천적으로 그의 유전자 속에 녹아 있는 문화지형으로서 자연스럽고 본래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앞으로 그의 작업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참 신기해요. 내가 돌에 대한 관심으로 화순 고인돌을 찍었고, 또한 느티나무를 좋아해서 열심히 찍었더니 느티나무가 화순군의 군목인 거예요. 운명처럼 화순과 인연이 닿아있었나 봐요. 이렇게 화순과 인연이 남도의 정서로 확대되고 결국엔 한국의 아름다움과 이어지리라고 생각해요. 거창한 목적을 갖기보다 그냥 내 주변의 익숙한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한길을 가겠다는 생각입니다.”


정직하게 꾸준히 한길을 걷겠다고 말하는 오상조 작가를 보면서 날랜 말은 빨리 갈 수 있지만 오래 달리지 못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반짝거리는 것들에 눈 돌리지 않고 자신의 깜냥을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쉼 없이 오랫동안 한길만 걷다보니 재빠르게 세상 것 욕심내며 동분서주한 것보다 훨씬 값진 것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무심이 빚어낸 결과물들이다. 시골집에서 텃밭 일구고 닭 키우며 유난히 빛나는 별 보고 잠들어 새소리에 잠에서 깨고, 고요 속에 몇 시간씩 금강경을 옮겨 쓰고 그러다 카메라 들고 고인돌 유적지나 작은 사찰을 찾아가는 소박하고 행복한 사진가 오상조 교수 그리고 사진문화관 명예관장. 앞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면 더 오롯하게 집중할 수 있게 될 그의 남도 문화기록에 기대가 크다.


천불천탑 사진문화관 개관기념전 “운주사”
2017년 4월 20일 - 8월 31일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 오상조 작가

해당 기사는 2017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