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전설들>알렉산더 로드첸코 (1891~1956)

<20세기의 전설들>
알렉산더 로드첸코 (1891~1956)
앙드레 케르테츠 (1894-1985)


20세기 사진사를 대표하는 두명의 작가. 알렉산더 로드첸코와 앙드레 케르테츠.
동시대에 활동한 두 작가는 기존의 회화적 관습을 거부하고 사진 매체만의 새로운 관점을 실험했다.
그러나 각각 러시아과 유럽에서 활동하면서 한쪽은 사회의 풍경을, 다른 쪽은 내면의 풍경을 담았다.
즉 사진의 생산성을 실험하는 로드첸코와 예술성을 실험하는 케르테츠.
두 개의 다른 풍경이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하는 여전히 던지고 있는 질문은 다르고, 같다.


도시의 혁명가
<알렉산더 로드첸코>


 

Street, 1929 ⓒAlexander Rodchenko
 
“배꼽의 시점은 모든 관광엽서에서 받을 수 있는 진부감, 나아가 혐오감마저 준다.”
- 로드첸코, , 1928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수평의 시점은 오래된 회화의 관습이다. 화가들은 수백 년 동안 나무를 수평 시점에서 그려왔으며 사진가들도 화가들을 따라 오랫동안 같은 관점으로 대상을 바라보았다. 즉 우리는 회화의 수평적 시점에 따라 눈높이나 배꼽의 위치에서 대상을 마주보고 인식한다. 특히 렌즈가 배꼽 위치에 있는 기존 대형 카메라와 같은 기술적 제한으로 사진사 내 이러한 시각적 관습은 고착화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 로드첸코는 이러한 ‘배꼽의 심리학’을 하나의 시각적 권위라고 인식하였으며 여기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한다. 때마침 기술 개발에 의해 등장한 휴대형 카메라를 이용해 그는 이제 1925년부터 고정된 위치에서 벗어나 시점을 자유롭게 이동시켰다. 고층 건물이나 공장, 작업대 위에 올라가 하이 앵글로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인물의 턱 바로 밑에서 극단적인 로우 앵글을 대상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한다. 새로운 원근법을 통해 시점에 충격을 가하는 이러한 과감한 시점의 변화를 로드첸코는 단순히 어떠한 위치에서 대상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문제를 넘어,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하는가를 결정하는 사유 방식의 문제로 여겼다. 사진의 시점은 단순히 앵글의 위치가 아니라 우리가 관습적으로 여겨온 사유의 방식을 뒤틀고 전복시키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속의 대상은 매우 일상적인 거리와 그 속의 주변 사람들, 풍경을 담고 있지만 우리에게 충격적인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 사진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지각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Portraitof the Artist’s Mother, 1924
ⓒAlexander Rodchenko

 
사진을 통해 시각적 사유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 결국 그는 인간의 지각방식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사회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new man)’을 창조하고자 했다.
-박상우 <로드첸코 사진전> 기획의 글 
 

Fire Escape, 1925 ⓒAlexander Rodchenko


또한 그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다양한 위치와 각도, 그리고 다양한 시간대에 대상을 여러 번 담는 것이다. 그는 한 장의 그림으로 인물의 총체성을 담으려는 회화적 시도를 부정하고, 여러 시간별로, 그리고 여러 앵글로 여러 장의 스냅 사진을 찍었다. 여러 장의 사진이 한 인물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때문에 그가 앵글을 바꾸고 여러 장의 사진을 담는 것은 고정된 관습과 고정된 전통을 벗어나려는 강한 부정의 제스처이자 적극적인 혁명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들에 대해 ‘급진적’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급진적은 부정적인 정치적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사실 급진적, 즉 radical은 씨앗이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이영준, 로드첸코 심포지움 발제 내용 중, 2017. 06. 10

 

The Poet Vladimir Mayakovsky, 1924
ⓒAlexander Rodchenko


당연하게 여기고 그대로 관습화되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다른 방향으로 자라려는 새로운 방향의 출발점. 그것이 급진성radical이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이러한 급진성에 의해 많은 반대파를 만들기도 했다. 가령 앵글과 시점, 빛에 대한 그의 형식적 실험에 대해 <소비에트 사진>지는 그가 1928년에 하이앵글로 찍은 보트 사진과 로우 앵글로 찍은 소나무, 그리고 발코니 사진이 표절이라고 발표했다. 그 사진들이 각각 마르틴과 랭거-파취, 모흘리 나기의 사진을 표절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로드첸코는 마르틴의 작품은 구성의 측면이 자신보다 약하지만 이러한 구성주의 사진은 많다고 말했다. 즉 이러한 작품들이 자신의 작품과 유사하다는 점을 역으로 강조하면서 이러한 앵글과 프레임은 원래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이 자신의 개인 시점이 아니라 우리의 시점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술은 소유의 관계가 아니며,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절대적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예술을 집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유의 미학으로 여겼다. 그 당시 모더니즘의 미학이 현실을 벗어나는 절대적인 세계를 재현하고 예술가는 그러한 자율적 세계를 창조하는 천재적인 개인이라고 여긴데 반해, 이러한 예술의 자율성에 반대하고 예술을 삶 안에서 다시 기획하려는 집단이 그 당시 아방가르드 활동가들이었다.   

 

Girl with Leica, 1934 ⓒAlexander Rodchenko


삶을 배반하는 공허한 미적 세계 대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생산적인 예술이 시대적 요청이었다. 로드첸코를 포함해 1920년대에 결성된 예술가 집단 인쿡Inkhouk은 현실과 유리된 기존의 낡은 예술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을 모색했다. 그들은 기존의 회화 예술과 결별하고 당대의 사회적 생산관계 안에서 삶을 혁신하는 구축주의 이론을 구체화시켰다. 또한 이를 실천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에 몰두한다. 그리고 로드첸코는 이러한 구축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1920년대 초부터 사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예술의 장소가 회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갤러리가 아니라, 대중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대중매체라고 여겼다. 즉 초창기에 회화 작업을 한 그는 이후 구축주의의 일환으로 잡지나 포스터, 광고 같은 대중매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결합하고 배치한 포토몽타주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점차 여러 미디어에서 따온 이미지들의 결합인 포토몽타주 안에 새로운 사진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카메라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Courier Girl, 1928 ⓒAlexander Rodchenko

 
각종 잡지와 광고지에서 복제한 사진들로 구성한 포토몽타주는 관습적인 장식적 요소를 전복하는 힘이 있었고 이는 그의 눈에 구축주의가 요구하는 새로운 미학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 박평종, 로드첸코 심포지움 발제 내용 중, 2017. 06. 10

 

Stairs, 1929
ⓒAlexander Rodchenko


그리고 그가 사진을 찍으며 시도한 여러 실험들. 극단의 앵글과 사진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선의 교차와 충돌, 흑백의 강렬한 대비와 빛을 다르게 비추는 새로운 관점, 과감한 클로즈업과 파격적인 프레임 등. 사진사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로드첸코만의 이러한 시점은 결국 대중이 가지고 있는 관습적인 지각 방식을 전복함으로써 예술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그의 오랜 물음이었다.

 

Pioneer with a Trumpet, 1930 ⓒAlexander Rodchenko


 
올해로 러시아혁명이 100주년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담아내는 앵글은 러시아 혁명 미술로부터 얼마나 변했나. 아트스페이스J에서 현재 진행 중인 로드첸코 사진전은 그의 작품이 현대 미술에 경종을 울린 그때로부터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는지 묻는다. 지금의 현대 미술은 과연 얼마나 삶 속에서 많은 실험을 하며, 계속 관습을 뒤집고,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는지 묻고 있다.

 
알렉산더 로드첸코 1914년에 졸업한 뒤, 졸업 한 뒤, 당시 가장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던 러시아 미래주의의 강의를 들었다. 이 때 미래주의의 시인인 블라드미르 마야코프스키를 알게 된다. 1921년 회화의 죽음을 선포하고 포토몽타주, 사진, 포스터, 책,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에 전념한다. 1924년부터 직접 사진을 촬영하기 시작했으며 주요 피사체는 어머니, 부인, 그리고 예술가 동료였다. 이후 그는 러시아의 주요 사진가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실험사진을 제작했다. 1928년 예술가 그립인 옥토버(October)에 가입하지만 형식주의자로 매도되어 3년 후 쫓겨난다. 1930년대부터 스포츠 사진 작업을 한다. 1940년대에 다시 회화로 복귀하지만 1956년 사망할 때까지 사진가로서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글 오은지 기자
이미지 제공 아트스페이스J

해당 기사는 2017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