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사진으로 읽는 대하역사다큐멘터리, 박하선

 
사진가의 집념을 보았다. 역사학자라고 해도 그 실체를 찾기 어려운 우리의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 사진으로 전달하겠다는 사진가 박하선(1954~ ). 그는 그 장대한 프로젝트에 홀로 뛰어들어 지난 30년 동안 중국 대륙을 넘나들며 조상의 흔적을 사진으로 기록해오고 있다. 우리의 상고사와 고조선, 고구려에서 상해 임시정부 시절까지, 조상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의 긴 여정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여러 권의 책과 전시를 통하여 작업결과를 발표해온 그는 올 여름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의용군의 눈물』이란 사진집을 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망각한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는 그에게서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만주로 떠났던 독립운동가의 결기가 연상된다.

 
 
박하선, 조선의용군의 눈물, 그들이 떠나고 세월이 흘러 세대가 바뀌어도 태항산 일대 주민들의 가슴속에는 조선의용군들이 있다.
ⓒ박하선
 
 

중국 대륙으로
 
한중수교가 성사되기 이전인 1989년에 그는 처음으로 중국 대륙에 발을 디뎠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여정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본격적으로 찍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지는 문명의 저편을 기록하고 티베트 같은 오지의 독특한 문화를 촬영할 참이었다. 그러나 실크로드를 여러 번 다니면서 대륙을 더 잘 알게 되고 그곳에서 우리의 먼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 후 그곳에서 조상의 흔적을 찾는 첫 작업은 “고인돌”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고인돌 작업을 진행하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만주에 고인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중국에 있지만 우리 조상들의 것이니 만주의 고인돌도 당연히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박하선, 고구려, 봉황산성의 북벽(작가가 안시성으로 추정)
ⓒ박하선


그러나 국내와 달리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다. 국내의 고인돌은 비교적 자료정리가 잘 되어 있지만 상세한 정보가 없는 만주의 고인돌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찍는다는 것이 너무나 막연했다. 대충 어느 동네에 고인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주민들에게 물으면 고인돌이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간신히 밭 가운데 있는 고인돌을 찾아내 촬영하면 “왜 남의 밭을 찍느냐?”며 공안을 불러오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사실 가장 힘든 건 고인돌을 찾아내는 것이었어요. 예를 들어 고인돌이 길림성 밤실마을에 있다는 기록을 보고 찾아가면 길림성 안에 밤실마을이 수없이 많아요. 찾는 것도 힘들지만 일단 찾았다고 해도 시각화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여러 번 가게 돼요. 계절이나 시간대에 따라 느낌이 다르니까요. 그러다가 어느 날 느낌이 확 올 때가 있는데 바로 그 순간 촬영을 합니다.”
 
 
박하선, 발해, 동경성 오공교(발해시대의 교각)
ⓒ박하선


박하선 작가는 몇 년간 고인돌을 찾아 헤매다 보니 마치 고인돌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왠지 저기쯤일 것 같은 그런 예지능력까지 생기더라고 했다. 마치 경계를 나타내듯 능선을 따라 고인돌이 죽 늘어서 있는 것을 발견한 적도 있는데, 그럴 경우 여기까지가 우리 조상들의 영역이었구나, 유추해볼 수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고인돌을 찾아 만주벌판을 뒤지다보니 그곳에 남아 있는 우리 조상들의 흔적과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이 “발해” 작업의 단초가 되었다.
 
 
수천 년 전으로 시계를 되돌리다

 
 
박하선, 그는 원래 역마살이 붙은 사람인 것 같다. 사진을 시작하기 전에 그는 일등 항해사였다. 국비가 지원되는 목포해양대학을졸업하고 배를 탈 때만 해도 남들이 가보지 못하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첫 월급을 타서 카메라부터 샀다.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고 따라서 남들이 쉽게 볼 수 없는 곳을 사진으로 남기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있었다. 1980년 그의 첫 전시인 <대양>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면서 독학한 사진솜씨를 발휘한 것이다. “꽤 유능한 항해사로서 선장이 될 수도 있었는데 배타는 일을 그만두었어요. 9년 동안 배를 타니 좁은 공간에 갇히는 느낌이 오더군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기분일 줄 알았는데 내 행동반경은 바다 위 일엽편주라는 생각이 들자 갑갑해지더라고요.”

 
배에서 내린 그는 결국 대양에서 대륙으로 방향을 틀었다. 비로소 그의 진짜 항해가 시작된 것이다. 천년, 이천년, 오천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 먼 과거로 시간여 행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아득한 옛날 우리 조상들의 자취를 발견한다. 신화로만 전해지는 단군이야기, 고조선, 발해, 고구려 같은, 한때 만주벌판의 주인이었고 그 땅을 호령했던 조상들의 유적을 찾아 사진으로 담을 때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반면에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무지하고 게으른 우리의 현실이 개탄스럽고 분통이 터지기도 했다. 어쩌면 이러한 자랑스러움과 분함, 이 상반된 감정은 그가 험난한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처음엔 5년만 하면 되리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1년 하고나니 10년은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몇 년간 작업하면서 이것이 10년으로 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젠 기한을 두지 않고 내 계획이 다 마무리 될 때까지 계속할 겁니다.”
 
 
역사학자들조차 역사가 아닌 설화로 취급하는 옛날 옛적 단군설화부터 고구려 때 당나라를 상대로 영웅적인 전투가 벌어졌던 안시성까지 그는 사진가의 촉을 최대한 극대화하여 그 실체를 찾아 나섰다. 물론 이런 작업을 위하여 많은 고증과 자료를 보고 역사학자의 조언을 듣는 것은 기본이었다.
 

 
박하선, 조선의용군의 눈물, 체험할 수 있도록 도보길을만들어 놓은 십자령 전적지 가는 길 
ⓒ박하선
 
“한겨울 만주벌판의 바람이 얼마나 차가운지 한번은 영하 2, 30도의 찬바람을 맞으며 단군시대의 유적을 촬영하고 있는데, 문득 전에 찾지 못한 발해시대의 교각에 대한 해답이 퍼뜩 떠오르는 거예요. 갑자기 ‘왜 다리를 건너가서 바라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차, 싶어서 그 자리에서 카메라를 접고 500km를 되짚어가서 다리를 건너 반대편을 바라보니 바로 내가 찾던 그 교각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때 왜 갑자기 엉뚱하게 그 생각이 났는지, 조상님들이 답을 주시는 것 같았어요.”

 
조상님들도 감동하셨을 만하다. 모두 앞만 보고 내달리는 세상에서 가물가물한 과거를 끈질기게 거슬러 올라와 자신들을 찾아오는 후손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반갑고 대견하셨을까? 박하선 작가 역시 그런 기적 같은 조상의 음덕에 뜨거워진 가슴으로 망망대해 같은 드넓은 만주벌판과 중국대륙을 넘나들며 계란으로 바위치 기 같은 고독하고 고된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조선의용군의 눈물
 

 

박하선, 조선의용군의 눈물, 上武村의 조선의용군
무명열사 묘지 ⓒ박하선
 


책의 제목은 그러하지만 조선의용군, 애국심으로 뜨거웠던 강인한 그들은 결코 울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의 흔적을 따라 피폐하고 험준한 땅을 찾아다닌 사진가가 눈물을 삼켰고 이제 그 사진을 보는 우리가 뜨겁게 눈물을 흘려야 할 차례다.
 
 
박하선, 조선의용군의 눈물, 雲頭底村에 남아있는 조선의용군들의 한글 흔적
ⓒ박하선

세월이 흘러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일본군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라는 한글로 쓰인 격문과 그들의 무덤 몇 군데, 다 허물어진 그들의 거주지 등만 가까스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들이 목숨을 바쳐 싸운 태항산에도 핏자국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잡풀들만 무성하다. 그러나 사진가의 예민한 감각은 바람이 전하는 그날의 함성과 젊은 나이로 스러져간 그들의 혼을 느끼는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진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박하선 작가의 사진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침묵으로 건네는 이야기는 귀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야하므로 『조선의용군의 눈물』이란 책의 사진들은 먼저 가슴으로 스며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어도 이데올로기의 벽에 막혀 그냥 덮어둔 역사가 되고 애써 외면한 이름이 된 슬픈 역사를 사진가는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강변하고 있다. “이들의 순수한 애국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독립군은 어디에 있는가?”
 

 

박하선, 조선의용군의 눈물, 의용군들이 머물렀다는태항산 기슭의 남장촌
ⓒ박하선
 
그의 흑백으로 찍은 산과 들, 마을은 지금도 황량하고 초라하여 80여 년 전 그때는 어떠했을지 쉽게 상상이 간다. 타국의 누가 식민지 국가에서 온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을까. 궁핍하고 곤궁했을 처지를 생각하면 참담하기 그지없는데 그래도 젊은 그들은 의지를 세우고 열정을 모아 당당하게 일본군과 맞선 기개를 생각하면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피가 끓는다. 박하선, 그도 그러한 심정으로 누가 일러주지도 않는 길을 수없이 오가며 조선의용군의 흔적을 기록하고 그들의 숨결이라도 전해보려고 흘러가버린 시간 되돌리기 작업을 한 것이다.
 
 
“천장”으로 2001 World Press Photo상 수상
 

박하선 작업의 가장 큰 줄기는 한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지만 처음부터 그의 관심은 우리나라에만 머물지 않고 아시아로 확대되었다. 그는 개인 생각임을 전제하지만 우리 조상들의 활동 범위가 한반도에서 만주는 물론 티베트와 아라비아 반도까지 미치고 있다고 믿는다. 오랫동안 실크로드를 오가면서 그는 아시아의 곳곳이 우리와 맥을 같이하는 이야기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박하선, 조선의용군의 눈물, 조선의용군들이 연안으로 이동해 와 처음 주둔했던川口村 전경
ⓒ박하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서 잘못된 점도 많아요. 나는 사학자가 아니어서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할지라도 사진가로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진가는 학자보다 더 리얼하게 현장을 접하고 감(感)도 빠르잖아요. 기존의 정설로 학습된 학자에겐 보이지 않는 ‘무엇’을 집요하게 찾아내고 새로운 시각으로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요. 기존의 학설에 묶여있지 않기 때문이죠.”
 
 
1989년부터 실크로드를 가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30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그에게 영광을 안겨준 “천장”은 그 가운데 대표작이다. 천장(天葬)이란 티베트의 장례의식으로서 시신을 땅에 묻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의 밥이 되게끔 땅위에 노출시켜서 육체를 독수리에게 보시하여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장례풍습이다. 이 의식은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서 그동안 제대로 기록된 사진이 없었는데 박하선 작가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아는 스님의 도움으로 해발 4000m가 넘는 고원에서 몹시 추운 겨울에 행해지는 천장을 흑백과 컬러로 고스란히 기록했고, 그 집념의 사진으로 ‘2001 World Press Photo상’까지 받았다.
 
 
“지금까지 저의 사진작업은 욕심이나 명예욕 없이 그냥 좋아서,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는 내년에는 조선시대 후기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를 소재로 한 사진 작업을 발표할 예정이다. 18세기 후반에 박지원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신의주부터 요동을 지나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지명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작업이다. 그와 함께 백제와 마한을 되살리는 국내에서의 작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고 몽골의 암각화를 비롯한 아시아의 암각화 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했다. 올해는 『조선의용군의 눈물』로 우리의 근대사를 조명했으니 단군 조선의 상고사까지 정리하면 그의 대하역사다큐멘터리 작업은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박하선, 조선의용군의 눈물,
의용군들이 직접 파서 생활하던 야오동들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긴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폐허로 변해가고 있다.
ⓒ박하선
 
30년간 역사발굴과 기록을 외롭게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부단하게 진행해온 박하선 작가. 다음 생에는 고고학자나 인류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그에게서는 근원에 대한 호기심과 승자의 기록보다 더 내밀한 진실에 다가가고 싶어 하는 열정을 엿볼 수 있다. 항상 의심하고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역사에 접근했다는 그의 말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진실에 다가가길 열망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다큐는 시간이 흘러야 가치가있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대하역사다큐멘터리가 시간과 함께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기대된다.


 

박하선 작가

 
박하선(1954년생~)은 개인전으로 <대양>(1980), <실크로드>(1990), <티벳>(1991), <문명의 저편>(2000), <천명(天命)>(2017), <太王의 증언>(2017), <人間을 보다>(2018) 등을 열었다. 작품집으로 『삶의 중간보고서』(1999), 『天葬』(2002), 『문명 저편의 아이들』(2005), 『천불천탑』(2007), 『생명의 갯벌』(2009), 『오래된 침묵(Ancient Silence)』(2011), 『발해의 恨』(2012) 등이 있다. 티베트의 장례의식을 담은 사진 ‘天葬(천장)’으로 ‘2001 World Press Photo 상을 수상한 바 있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박하선 작가

해당 기사는 2019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