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그가 보여주는 정공법의 아름다움, 강운구

나는 경주 남산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나 새로 옮겨 개관한 ‘류가헌’에서 초대 전시된 강운구 사진전 “경주남산”을 보면서 오히려 가보지 않은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재를 잘 보존하겠다는 취지의 졸속행정에 의해 망가지고 떼 지어 몰려드는 관광객들의 무심한 발길에 훼손된 경주 남산의 원형은 이제는 현장이 아니라 강운구 선생의 사진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겠기에 말이다. 1983년부터 사오년 동안 지속된 강운구 선생의 경주 남산 작업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사진의 기록성이 어떤 가치와 아름다움을 갖는지 확인시켜준다. 

 

ⓒ강운구


강운구 
그가 보여주는 정공법의 아름다움



강운구의 “경주 남산”, 천년의 세월을 품다  

돌이켜보면 사진기자 강운구가 80년대 초부터 프리랜서 사진가로 광야에 내몰린 것은 공익적으로는 아주 잘된(?) 일이었다. 출퇴근에서 벗어나 그가 진짜 하고 싶던 일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첫 작업이 1983년에 시작한 “경주남산”이었다. 마침 그의 나이 40대 초반이었다. 


“열화당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로 하고 1년 동안 빈번하게 경주 남산을 오가며 촬영한 뒤 사진을 정리하기 위해 강원도로 들어갔는데... 결국에는 그 숱한 필름을 거의 폐기해버리고 말았어요.”


 

​ⓒ강운구


원숙한 사진가로서 1년간 경주 남산에 열정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몰입하여 사진을 찍을 때는 몰랐는데 결과물 전체를 놓고 살펴보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는 것. 너무나 잘 찍으려고 기를 쓴 것이 드러나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열화당 이기웅 대표는 작가가 마음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이미 사계절 촬영을 한 끝이라서 얻게 된 촬영 데이터를 가진 데다 욕심까지 버리니 사진이 잘 찍히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87년에 사진집 “경주남산”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컬러로 출간된 그 사진집은 30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꾸준히 인쇄를 거듭하면서 강운구와 경주 남산을 동의어로 각인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흑백으로 찍지 못한 것이 아쉬웠어요. 판형이 다른 여러 대의 카메라로 작업을 하느라 흑백까지 찍을 여유가 없었거든요.”


 

​ⓒ강운구

그 아쉬움은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해결되었다. 흑백을 컬러로 변환하지는 못하지만 컬러를 흑백으로 변환할 수 있기에 컬러로 촬영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 되었다. 30년 만에 “경주남산”은 색깔을 빼냄으로써 더욱 고요하고 간결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드나드는 바람에 오솔길은 대로가 되었고, 문화재 관리자들은 불상 위에 지붕을 만들어 씌우는 일 같이 쓸데없는 보호 장치를 해놓아서 그때의 분위기는 사라졌어요. 30년 전만 해도 하루 종일 촬영을 하면서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고 조용했는데…  ” 


 

​ⓒ강운구


마치 먼 옛날 유토피아 같은 촬영 당시의 분위기를 듣는다. 가장 적당한 빛이 비치기를 기다리느라 불상 앞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사과를 깎아먹기도 하면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솔바람을 맞으며 산중에서 홀로 유유자적하는 사진가! 저 불상을 만든 신라 사람들은 어떠했을까 상상하며 세련된 건 세련된 대로 투박하면 투박한 대로 그들의 정성을 생각하며 천년 후 사진가도 최선을 다해 정공법으로 기록해나갔던 그 시간이 사진에 배어 있다. 과거를 찍을 수는 없지만 그 시절에 빙의되어 최대한 당시의 분위기를 재현해내고자 한 사진가의 수고로 인해 지금은 현장에 가도 볼 수 없는 경주 남산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갖는 기록의 가치와 미덕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자기의 신념은 자기가 지키는 것 


 

​ⓒ강운구
 
사진은 기록과 재현의 매체로 탄생했다. 그리고 그 특성을 제대로 살릴 때 가장 사진답다. 시대에 따라 기록의 대상은 달라질 수 있지만 사진 고유의 특성인 기록과 재현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미술관 벽에 걸리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사진의 기록성은 예술성이란 미명 아래 희미해져가고 있다. 이런 추세는 80년대 이후 급속히 바람을 타면서 사진의 기록성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 가고 스트레이트 사진은 한물 간 촌스러움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대다수가 이런 새로운 경향으로 내달릴 때 소수에 속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강운구 선생은 사진의 기록적 가치에 대한 신념에 흔들림이 없다.


 “쌀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요리가 밥이듯 사진술로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기록”이라고 믿는 그는 “그런데 밥그릇에 담겼다고 해서 다 밥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즉 카메라로 찍었다고 해서 다 사진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진가의 시선이 제대로 꽂히고 대상에 대한 해석이 깊이를 더하고 정공법으로 완성도 있게 표현해낼 때 사진 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극명해진다. 예술성이란 말로 덧칠할 필요 없이 사진 자체로 완벽한 것이다.


 

​ⓒ강운구


그는 잘 알려진 사진가임에도 불구하고 50대가 되어서야 첫 전시를 열었다. 1994년 학고재에서 열린 “우연 또는 필연”이 그것이다. 이어 “모든 앙금”, “마을 삼부작”, “저녁에”, “오래된 풍경”이 몇 년의 간격을 두고 열리면서 일관된 그의 사진 세계를 보여주었다. 또한 사진에 버금가는 필치로 “강운구 사진론”이란 책을 펴내 오랫동안 고민하고 천착해온 사진이론을 명쾌하고 단호하게 제시했다.   


한편, 그는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수용 작가’라고 말한다. 한국의 작가들이 ‘세계적’에 목을 매달고 외국만 쳐다보는 것에 대한 거북함의 반어법일 것이다. 그는 늘 이 땅의 산하와 역사에 관심을 갖고 차근차근 그것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이 땅에서 태어난 사진가로서 이 땅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있다는 생각뿐 아니라 작가가 가장 잘 아는 대상이므로 가장 잘 찍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역사적 흔적이 있는 곳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고리가 되고 또한 미래로 연결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요. 나의 ‘오래된 풍경’이 그런 작업인데 말하자면 이 땅에 애정을 바치는 작업이지요.”


그는 애매모호하다는 것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과 통한다고 말한다. 잘 팔리는 사진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사진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사진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강운구


전시장에 걸린 50여 장의 사진과 백의민족의 옷 같이 흰 표지로 만든 흑백판 사진집 “경주남산”을 앞에 놓고 나눈 강운구 선생의 사진 이야기는 우회 없는 솔직한 화법으로 그 의미가 분명하고 거침없고 담백했다. 문득 작품은 작가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의 사진론이 구현된 것이 그의 사진이고 그의 사진이 평소 그의 사진론과 일치하니 좌고우면하지 않는 정공법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강운구 작가, ⓒ사진예술


세상에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도 많고 사진으로 이름을 얻은 사람도 많고 작품 가격이 비싼 사진가도 있지만 오롯하게 사진으로 자신을 지키고 정직하게 사진으로 자기의 철학을 말하고 후배들에게 사진으로 존경받는 사진가는 드물다.  강운구 선생은 바로 그 소수에 속하는 사진가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 류가헌 갤러리

해당 기사는 2017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