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노기훈, <日蝕 일식>


형식의 변화, 차이의 시도

 
해가 달에 가려지는 일식(日蝕), 작가 노기훈은 가리고, 가려지고, 겹치고, 그렇게 또 지나가는 일식의 과정에 빗대 20세기 인간과 자연이 어울렸던 낭만의 정서를 20세기~21세기 사진에서 일어난 변화의 지점들과 접목해 〈日蝕 일식〉(BMW Photo Space, 8.26–11.9)에서 보여준다. 흑백에서 컬러사진으로, 필름에서 디지털 사진으로의 기술적 변화는 물론 전시 방식의 한 요소로 쓰이다 사라지고 있는 원형 프레임과 매트(Mat)를 작품으로 주제화하기도 했다. 사진의 여러 가치에 대한 사진가로서의 고민을 다양한 사진 양식의 교차, 나열, 병치, 전복으로 보여줌으로써 사진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도한다.



노기훈, Eclipse #012, 2018,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43x35cm ⓒ노기훈


 
 
노기훈 〈日蝕일식〉 전시장 전경
 

해와 달, 자연과 인간 사이 인력(引力)
 

〈日蝕 일식〉에는 원형 프레임 속 가마쿠라(鎌倉市) 연인 사진과 필름지에 출력한 바다 사진, 그리고 전시에서 이미지를 지지하고 보호하는 재료로 사용하는 매트를 이용한 사진과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흑백 사진, 네거티브 필름, 사진에서 배제되어가는 매트를 전시장에 소환하는 이야기예요. 사진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진에 다양한 양식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사진으로 그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생각했고요. 지금은 고루해진 가치들, 촌스럽게 생각하지만 그런 옛것은 분명 사라지지 않았어요. 전시장에 오시는 분들이 그것의 표피라도 다시 생각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노기훈, Eclipse #001, 2017,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43x35cm ⓒ노기훈
 

〈日蝕 일식〉은 고도(古都) 보존법의 보호를 받아 옛 역사와 전통 그리고 자연 풍경의 정취가 남아 있는 일본 가마쿠라에서 노기훈 스스로가 느낀 20세기 낭만에서 시작한다. 그는 2017~18년 일본 요코하마 등지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도쿄에서 약 50km 떨어진 가마쿠라를 찾아갔다. 그에게 가마쿠라는 바다와 후지산, 옛 절과 신사를 그대로 지켜온 풍경이자, 개개인으로 사는 도시민들이 찾아와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 풍경을 그는 20세기의 낭만이 있는 풍경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노기훈은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1903~1963)의 작품을 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 소설을 읽으면서 20세기 정서에 다가갔고, ‘사랑’을 주목했다. 그리고 가마쿠라 해변에서 마치 해와 달이 인력에 끌리듯 서로에게 다가서고, 포개지는 연인들을 촬영했다. 컬러 사진으로 촬영해 20세기에 성황을 이뤘던 흑백사진으로 포토샵에서 변환하고 입자가 큰 필름 사진처럼 보이도록 그레인(grain) 효과를 주었다. 도형 가운데 완벽한 형태를 이루면서도 크기와 모양이 다양한 원형의 프레임으로 이미지를 잘라, 한 장에 여러 장을 배치했다. 이미지에 맞춰 매트를 자르고 액자에 넣음으로써 옛 사진이 풍기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노기훈, Eclipse #022, 2018, UV print, 125×100cm ⓒ노기훈
 

한편 가마쿠라의 바다는 컬러 슬라이드 필름과 흑백 네거티브 필름을 넣어 4×5″ 대형 카메라로 바다의 근경, 중경, 원경을 촬영했다. 초점거리가 다른 렌즈를 사용해 같은 거리에서 눈에 보이는 장면의 변화를 가져오는 카메라의 특성을 활용했다. 그중 세 장을 대형 투명 필름지에 각각 포지티브로 출력해, 전시장에서 통로처럼 좁은 한쪽 공간 천장에 나란히 걸었다.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관람객은 한 장만 볼 수도 있고, 세 장을 겹쳐 볼 수도 있다. 또 어느 사진을 보느냐, 멀리 보느냐, 가까이 보느냐 역시 선택에 달려 있다. 노기훈은 한 곳에서 차례로 바라보는 근경, 중경, 원경을 마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선형적인 시간에 견주어 “지금 이 시대에 모두가 같은 시간 감각을 가지고 살고, 점점 세계가 진화해 나가고, 발전해 나갈 거라고 감히 믿었던 당대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었다.
 
 
사진의 매트를 주제화, 작품화

 
 
노기훈, Eclipse #018, 2019, japanese paper and mat, 80×60cm ⓒ노기훈
 

〈日蝕 일식〉에서 볼 수 있는 노기훈의 또 다른 사진은 매트를 이용한 조형 사진이다. 그는 연인들의 사진에서 이용한 원형처럼, 사각의 매트에서 작고 둥근 여러 원형을 잘라내 바닥에 떨어뜨려 그 순간을 촬영했다. 또 잘라낸 다양한 크기의 원형 매트를 좌대에 꽂아 설치하고, 원형으로 부분 부분을 잘라낸 사각의 매트는 액자에 끼워 전시했다. 사진의 매트를 아는 사람에게 이 작품은 버려질 매트를 전시한 것으로 보이지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로 보일 수 있다.
 
“매트는 사진을 보호하는 장치로서만 사용되잖아요. 매트가 인화된 이미지 위에 있지만, 사람들은 매트에 비껴서 있는 노출된 이미지만 바라보죠. 제가 전시로 나타내는 것은 우리가 사진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과 그것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을 전시장에 함께 구성을 하는 거예요. 매트를 이미지와 똑같은 지위로 보여주는 방식처럼 말이죠.”


 
 
노기훈, Eclipse #021, 2019, mixed media ⓒ노기훈
 

사진에서 이미지와 매트의 기능과 역할을 역전시켜, 온전히 매트를 주목했다. 이로써 우리가 사진의 규정된 양식이라 봐왔던 것들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또한 원형 매트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사진은 원형이 가져오는 운동감, 그리고 서로 엇갈려 기대면서 생기는 그림자로부터 조형감을 보여준다. 또 좌대에 꽂힌 여러 크기의 원형 매트는 관람객이 서는 위치에 따라 서로 중첩되기도, 엇갈리기도 하고, 사이드 조명으로 인해 생긴 매트 사이사이 그림자의 방향이 달라지기도 한다. 노기훈은이 작품으로부터 관람객이 전시 제목이기도 한 ‘일식’을 연상하는 것을 넘어서 확장된 자연, 남과 여 또는 빛과 어둠과 같은 추상으로서의 자연까지 떠올리기를 바랐다.
 
 
노기훈, Eclipse #019, 2019,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60x60cm ⓒ노기훈
 
 
전시를 보게 된 사람은 나름대로 해와 달의 형상과 ‘일식’과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이때 자연이라는 건 우리가 알고 있는 익숙한 자연이 아니에요. 해와 달과 같은 것들이 바닥에 박혀 있는, 인간으로서는 보거나 가질 수 없는 운동감이거든요. 일식은 단순히 해와 달의 관계로 말하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에서도 심적인, 신체적인 일식이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는 그런 운동감, 생경한 감각들을 주고 싶었어요.
 
 
노기훈, Eclipse #002, 2018, pigment print on japanese paper, 43x35cm ⓒ노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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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기훈은 2016년 개인전 <1호선>에서 서울의 지하철 1호선 일부 구간을 걸으며 역 주변의 공간과 인물들을 기록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들은 1호선이라는 장소성이나 인물이 그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가 “1호선” 시리즈에서 장소성이 아닌 1호선에서 그 스스로가 느꼈던 ‘변두리 정서’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日蝕 일식〉에서도 역시 그가 보여준 ‘가마쿠라’의 풍경은 여느 해변가 풍경처럼 장소성이 모호하다. “1호선”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그는 촬영 장소에서 그가 느낀 감각과 정서, 즉 가마쿠라의 ‘20세기 낭만’의 정서를 원형 프레임의 흑백 사진과 사진의 여러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저는 사진가의 역할이 번역가의 역할과 굉장히 흡사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제 사진에서 보이는 방식은, 어떤 환경에 놓임으로 인해서 느끼는 그 공간이 가진 정서나 장소성을 기표 이외에 것들로 나타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스스로가 사진의 대상 혹은 공간에서 느끼는 감각과 정서를 사람들이 쉽게 읽어낼 수 있는 사진의 일반 형식이 아닌 차별화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일반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움일 수 있지만, 난해와 오해를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이를 두려워한다면 결코 차이를 만들 수 없기도 하다.
 

노기훈(Gihun Noh, 1985년생)은 개인전으로 <미장센>(공간 지금여기, 2015), <1호선>(KT&G상상마당, 2016), <달과 빛>(뱅크아트 NYK 요코하마, 일본, 2018), <일식>(Site-A Gallery 요코하마, 일본, 2018)을 가졌다. 2015 제8회 KT&G 한국사진가 지원 프로그램 SKOPF 올해의 최종 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글 : 정은정 기자
이미지 제공 : 노기훈 작가
 
해당 기사는 2019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