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들꽃 피는 분교 들꽃 같은 사진가,강재훈

저 혼자 피었다 지는 작은 들꽃은 느린 걸음일 때 잘 보인다. 옆도 뒤도 돌아볼 겨를 없이 앞으로만 내달리는 사람들에게는 들꽃까지 눈여겨봐 줄 여력이 없다. 그런데 발 빠른 신문기자로 살면서도 30년 동안 쉬지 않고 “들꽃 피는 분교”를 촬영해 온 사진기자가 있다. 강재훈, 그는 분교를 더 자주 찾아가고싶어 강원도로 접근하기 편리한 서울의 동쪽 끝에 집을 정했고 나중엔 아예 강원도 인제로 이사해 그곳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며 분교를 기록했다. 사진기자와 사진가 사이, 엄청난 에너지와 열정으로 두 역할을 병행한 강재훈 작가는 올 4월 말에 한겨레신문사에서 정년퇴직하고 비로소 온전히 사진가만의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마침 올해는 1991년 첫 분교 촬영 이후 30년째가 되는 해여서 “들꽃 피는 학교, 분교”라는 제목으로 류가헌 갤러리에서 전시(6.9~7.19)와 사진집 출판기념회를 함께 열었다.


하늘 아래 첫 학교


 

하늘 아래 첫 학교 경남 밀양 사자평분교 ⓒ강재훈


“하늘 아래 첫 학교”라는, 우연히 강재훈 기자의 눈에 들어온 한 줄 제목이 그의 분교 촬영 30년의 단초가 되었다. 문득 어릴 적 기억, 우리나라의 동쪽 끝, 가장 남쪽 끝은 어떤 곳일까, 막연히 상상하며 가보고 싶었던 생각이 나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학교는 어떨까,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래서 찾아 나선 곳이 바로 경남 밀양의 재약산 아래 사자평분교, 일명 고사리학교였다.

 
“해발 1,000미터에 가까운 높은 곳에 위치한 사자평분교를 마을 사람들은 공식 명칭 대신 고사리학교라고 불렀어요. 고사리가 많이 나는 산골이라서 그랬겠지만, 그 이름이 더 정겹고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촛불 두 개를 켜놓고 공부하는 사자평분교의 학생 ⓒ강재훈


그날 밤을 학교 옆 민박집에서 묵었는데 민박집 아들이 앉은뱅이책상에 촛불 두 개를 켜고 공부하는 모습이 문틈으로 보였다. 벌떡 일어나 아이의 방으로 건너갔다. 서울에서 손님이 오는 날에만 촛불 두 개를 켰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였다. 그가 사진을 찍으려 부스럭거리자 민박집 주인도 방에서 나왔다. “서울에서 고모님이라든지 손님이 와야만 켜던 촛불 두 개”에 대한 자신의 추억을 이야기하니 그 주인은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도 아들이 공부할 때만 촛불 두 개를 켜요.”


그때 그는 알아차렸다. 전기가 들어오면 소중하던 촛불 두 개의 추억도 까마득해지듯이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라 분교도 점점 사라질 것이란 것을.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전국의 분교가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일간지 사진기자의 빡빡한 일정 속에서 주로 오지에 위치한 먼 분교를 촬영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주말과 휴가 등 개인적으로 틈이 날 때마다 또는 선배와 동료의 양해 아래 시간을 짜내 분교로 향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경기 화성 우음분교 ⓒ강재훈


운동장에 오로지 선생님 한 분과 학생 한 명뿐인 경기도 화성 우음분교 조회 시간. 선생님이 “혜진아~ 학교 와라~”라고 부르시면 달려와 선생님께 인사하는 것으로 하루 시간표가 시작된다. 또, 나룻배를 타고 등교하는 강원도 정선 연포분교 어린이들의 모습도 있다. 강원도 산골 진동분교의 가을 운동회는 전교생이라야 열댓 명 안팎. 넓은 운동장이 허전하다. 그러나 등하굣길 가방을 멘 채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는 개구쟁이들의 모습은 건강하고 즐겁다.

 
강원 정선 연포분교 ⓒ강재훈


대도시의 콩나물교실을 경험한 세대나 시골의 넉넉한 자연 속에서 자란 세대 모두에게 강재훈 작가의 분교 사진은 철모르고 뛰어놀던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해가 질 때까지, 엄마가 저녁밥 먹으라고 소리쳐 부를 때까지 씩씩하게 뛰어놀던 시절이 학원을 전전하는 오늘의 어린이들과 대조되어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 시대와 오늘날은 마치 흑백과 컬러사진의 차이처럼 느껴진다. 색이 풍부한 컬러사진이 단조로운 흑백사진의 아름다움을 능가한다고 할 수 없듯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오늘날이 가난했던 그 시대보다 행복한 것일까? 작가는 분교 사진을 통해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전하며 조용히 묻고 있는 것 같다.
 
 
1991년부터 시작한 분교 촬영은 1998년에 “분교, 들꽃 피는 학교”라는 전시로 발표되었다. 이 전시는 야금야금 폐교가 진행되던 상황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켰다. 1982년부터 ‘소규모학교 통폐합 정책’을 펴면서 200명 이하의 분교를 마구 폐교해오던 상황에서 “학생수의 기준을 100명 이하로 낮추지 않으면 모든 분교가 없어진다.”는 문제 제기의 계기가 되었다. 신문기자라는 신분이 무조건 통폐합시키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 일조했다.


행정 편의상, 경제 논리상, 작은 학교들이 무차별 폐교되면서 강재훈 작가가 찍은 대부분의 분교도 사라졌다. 분교를 운영하는 것보다 통학버스와 운전기사를 고용하여 학생들을 실어나르는 편이 더 경제적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그러나 오지의 학교는 공부하는 장소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었다. 부모가 새벽부터 들과 산으로 일을 나가 텅 빈 집, 텅 빈 마을에서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방과 후에도 선생님이 계신 학교의 운동장에서 놀며 하루를 보내는, 따라서 돌봐줄 부모가 없이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단월 산음분교 운동회 ⓒ강재훈


그는 1998년 전시 이후 가을운동회를 집중적으로 찍었는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통상 가을운동회는 전국의 모든 학교가 9월 말부터 10월 초, 일주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실시하는데 직업상 개인적인 작업을 위하여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매해 가을마다 열심히 노력한 덕에 2006년에는 “산골분교운동회”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고 2009년에는 “산골분교”라는 제목의 전시를 열면서 어느새 그에겐 ‘분교 사진가’라는 명칭이 따라왔다.


그는 분교 전시와 함께, 한편으로는 ‘작은 학교 살리기 연대’에 꾸준히 동참, 2019년에 드디어 교육부의 정책을 수정하는 성과를 거뒀다. 앞으로는 폐교 대신 휴교를 하게 된 것. 덕분에 제주도 최남단 마라분교, 서해상의 소청분교 등은 폐교하지 않고 휴교의 상태로 남게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 부부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1982년부터 2019년, 이 수정안이 나오기까지 전국에서 6천여 개의 작은 학교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분교가 바꾸어놓은 삶


 

경기 양평 명달분교 ⓒ강재훈


그동안 그가 찾아다닌 분교는 100군데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강원도 정선 삼척 인제 홍천에서 전남 여수 순천, 경남 밀양 등 그의 발길은 동서남북 어디로든 향했다. 그중에서 경기도 양평 중미산 넘어 명달분교를 찾아간 것은 사진기록으로 남은 횟수만 68번이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학교 수업을 했기 때문에 신문사 당직이 없는 토요일에는 무조건 명달분교를 찾았다. 명달분교의 모든 것을 담겠다는 결심으로 토요일마다 집을 나서자 그의 아내도 포대기로 아이를 싸고 밥솥을 들고 따라나섰다. 새벽밥을 해서 차 안에서 그 밥을 김으로 싸서 남편의 입에 넣어주며 촬영에 동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급기야 강원도 인제 진동분교 촬영을 하면서 자신의 두 남매를 분교로 전학시키기에 이르렀다.


90년대만 해도 서울에서 인제까지 닿으려면 4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조금 더 빨리 강원도에 닿기 위해 서울의 가장 동쪽인 상일동에 집을 마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여의치 않았다. 마침내 아내와 상의, 아예 인제에 거처를 마련하고 남매를 그곳 진동 분교로 옮겼다. 그렇다고 서울과 인제 사이 그의 출퇴근 거리가 좁혀진 것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저녁에 퇴근하자마자 인제로 달려가면 밤 12시, 동네 친구들과 얼굴 보며 정담을 나누다가 잠자는 아이들 얼굴만 보고 새벽 4시에 다시 서울로 출발했다. 그로 하여금 “4시간 반을 달려오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강원도 인제 진동분교 운동회,


사진의 피사체로서 분교와 자신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촬영하는 것은 심리적이나 정서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서는 아이들은 그의 아이들의 친구이고, 그 아이들에게 사진가 아저씨는 친구의 아빠다. 또한 동네 사람들은 다 같은 학부모의 입장이고 그러니 학교에 대한 문제를 공감했다. 예를 들어 가을 운동회를 분교에서는 자체적으로 하고 싶어 하는데 본교에서는 합류하여 한꺼번에 치르길 원했다. 그러나 소수의 분교 아이들이 본교로 가면 낯선 환경에서 소외감을 느끼다가 풀이 죽어 돌아오기 마련. 결국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분교운동회를 관철,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까지 동네잔치가 되어 신나는 운동회의 추억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되면서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소박한 분교 사진이 만들어졌다.

 

강원도 인제 진동분교 운동회,


사진을 찍는 것을 넘어서 대상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진가의 진정성은 사진뿐 아니라 그의 삶에도 고스란히 남았다. 25년 전 사진 속 어린이들은 이젠 30대 청년이 되어 그를 큰아빠라고 부르며 ‘사진가와 피사체’의 관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분교를 졸업한 그의 두 아들딸도 명문대를 나와서 직장에 다니는데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 먼 길을 달려와 잠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간 아빠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그의 아내는 산골생활의 경험을 살려 ‘치유의 숲’과 관련한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전문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저도 커서 아저씨처럼 기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했던 아이는 정말로 강원민방 기자가 되어 올봄 고성산불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보도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사진가가 사진을 통하여, 사진을 하는 행위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가를 강재훈 작가는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들꽃처럼 나무처럼


강재훈 작가가 분교에 관련한 작품 외에 애정을 가졌던 주제는 ‘어머니’다. 2009년과 2010년에 “부모은중”, 2014년에 “꼬부랑 사모곡”이란 제목의 전시를 개최했는데, 산등성이처럼 등이 휜 시골의 어머니들이 밭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우리 어머니들은 왜 그렇게 자식들에게 일방적인 사랑만 퍼부으실까?”라는 생각에 울컥했다고 한다. 자신도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비로소 “아, 평생 아무것도 누리고 사신 적이 없으시구나.” 깨달았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속죄하는 심정으로 어머니들을 촬영했다고 말한다.


분교를 촬영하기 위해 강원도를 오가면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강원도 그 녀석”이다. 어스름한 달밤에 또는 어슴푸레한 새벽녘에 인제를 오가면서 자식을 대하듯 찍은 나무 사진, 그 주인공이 바로 강원도 그 녀석이라고 불리는 나무라고 한다. 혼자 운전하며 달리는 도중에 만난 그 나무는 언젠가 “강원도 그 녀석”이란 제목으로 소개하리라 마음먹고 열심히 찍었는데, 신기하게도 올봄 그의 퇴직과 맞춘 듯이 베어져 사라졌다.


 
“올봄에 갑자기 나무가 없어지니 기분이 묘했어요. 베어진 도막만 쌓여있기에 막걸리를 사다가 부어주고 작별 인사를 했어요.”


2019년 “숨”이란 전시를 통해 나무와 숲을 보여준 바 있는 강재훈 작가는 다음엔 강원도 그 녀석을 중심으로 나무와 숲을 보여주는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그의 나무 사랑은 참 유별하다. 그동안 전국의 분교를 찾아다닐 때, 봄에 묘목을 좀 사두었다가 “여기쯤 나무가 있으면 좋겠다.” 싶은 곳이 보이면 묘목을 심어왔다고 한다. 다음에 그 길을 또 지나가다가 기억이 나면 눈인사를 나누고 더러는 말라 죽어 버린 경우도 보았다.


굳이 내 집 마당이 아니라도 소유의 개념 없이 전국의 여기저기 발길이 닿았던 곳에 그저 나무가 좋아서 나무를 심은 그의 마음처럼 그를 닮은 나무들이 어딘가에서 거목이 되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을 것이다. 그의 사진 또한 그의 바람대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주는 치유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나무 사진 외에도 그는 기자라서 만날 수 있었던, 이젠 고인이 된 신영복 교수, MBC 이용마 기자 같은 분들의 인물사진전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기자 강재훈으로도 잘하고 싶었고 사진 작업을 하는 강재훈으로도 잘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강재훈 작가. 이젠 한 가지 짐을 벗었으니 오로지 사진가로서 그의 미래가 주목된다.
 


 
강재훈(1960 ~)은 일요신문 사진기자로 시작하여 2020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정년 퇴임하기까지 사진기자 생활 33년을 마감했다. 1986년 첫 개인전 <산과 들에서> 이후 1998년부터 분교 관련 사진전과 어머니를 주제로 한 사진전, 그리고 올 6월 분교 촬영 30년 기념전까지 개인전 13회, 사진집 10권을 출판했다. 현재 한겨레 포토아카데미 ‘강재훈 사진학교’ 전임강사이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 강재훈 작가

해당 기사는 2020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