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극단까지 갔을 때 비로소 열리는 세계, 전흥수

남들처럼 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재미없기 때문! 누구나 다 한다면 굳이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190년 사진사에 기록된 사진작업과 다른, 나만의 독특한 표현을 보여주고자 애써온 전흥수 교수(신구대학교 사진영상미디어과)는 작가로서 각오부터 남달랐다. 사진의 표현영역을 최대한 확장해보겠다는 것이 목표였고 항상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겠다는 것이 작업강령이었다. 첫 개인전에서 “이게 사진이야?”라는 물음 앞에 선 지도 벌써 30년 가까운데, 아직도 그의 작품에는 그런 질문이 따라붙는다. 말하기 전에 습관처럼 빙글빙글 웃음부터 짓는 그의 표정은 이렇게 반문하는 듯하다. “사진은 변하면 왜 안 되는 건데?” 변하니까 예술이고 새로워야 예술이 아닌가.

 

Ⓒ전흥수, 양귀비, garden poppy, 100x150cm, digital print on paper, 2017
 
 
전흥수 "빛의 기억“전/ 2017년 11월 7일 - 12월 28일 아트스페이스J


산은 산이요

산은 산이다. 그러나 늘 보아온 익숙한 산의 모습이 아니다. 산의 형태를 가늠케 하는 아웃라인은 남아있지만 산이 품었던 디테일은 사라지고 대신 작가가 ‘꿈꾸는 산’이 펼쳐진다. 창조주가 만들어준 자연의 모습을 카메라로 떠내 보여주는 수고만 해도 되련만 전흥수 작가에게 그것은 아주 싱겁고 기초적인 단계에 불과하다. 그의 작업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그 후, 사진이미지를 컴퓨터에 저장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그 과정을 ‘컴퓨터와 전쟁’이라고 말한다.


 
“디지털 강점이 변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변수가 너무 많다는 것은 고단하지만 또한 매력이지요. 예전에 암실에서 인화지 위에 상이 서서히 떠오를 때 느꼈던 신비한 느낌의 몇 배, 몇 십 배라고 할까요? 한 번 시작하면 도저히 중간에 그만둘 수 없게 빠져들어 밤을 지새우며 작업을 하게 돼요. 그러다보면 ‘바로 이거야!’라는 순간이 와요.”


번뜩임의 그 순간은 ‘죽을 만큼 몰두하다보면’ 맞닥뜨려지는 순간이라고 했다. 얼핏 보면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놀듯이 쉽게 한 유희로 비칠 수도 있는데 작품 한 점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은 장인정신을 능가하는 집요한 끈기와 집중력과 숙련된 노하우와 미적 감수성이 통합되는 과정이다.

 
“예전에 필름작업을 하던 시절에는 일단 프린트되어 사진이 나오면 최종결과물이어서 더 이상 손댈 수가 없는데 디지털 작업은 끝이라는 게 없어요. 여기까지, 라고 생각하고 작업을 마쳤는데 다음날 보면 뭔가 미진해요. 그러면 다시 만지기 시작하죠. 최종이 없고 항상 실험과 과정의 연속이에요.”


지금 아트스페이스J에서 전시 중인 작품도 그렇다. 지난 2년 동안 컴퓨터 앞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감내하며 열심히 작업하여 얻은 결과물을, 전시 두 달을 앞두고 만족스럽지 않아서 다시 슬슬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 결국 미친 듯이 작업으로 빠져들어 재탄생한 작품들이라고 했다. 다행히 작가의 마음에 드는 결과를 얻었다고 하는데, 그는 “평론가의 비평보다 나 스스로 기분 좋고 만족스러운 작품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진의 변신은 무죄


 

Ⓒ전흥수, 거제도, Geoje Island, 75x120cm, digital print, 2017


시각디자인을 공부하고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그가 영상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후 1989년 도쿄에서 연 첫 번째 개인전은 빛과 물감, 드로잉이 한데 어우러져 나타난 컬러 이미지였다. 초창기 그의 작업은 컬러필름을 분판하여 채색하고 현상탱크에 넣었다가 다시 암실에서 듀프를 뜨는 식의 사진프로세스와 드로잉이 겹쳐진, 즉 기계적인 작업과 수작업이 결합된 형태의 복합적인 작업이었다. 흑백사진과 달리 접근하기 어려운 컬러사진 암실작업을 손수하면서 미술대학 출신답게 드로잉을 가한 ‘사진 더하기 그림’ 같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1992년에 작품을 발표했을 때 그림 쪽에서는 사진이라고 말했고, 사진 쪽에서는 사진이 아니라고 했다. 그 후 사진과 회화의 경계에서 조금 더 사진다운 작품을 보여주려고 한 작품을 1997년에 발표하게 되는데, 그 전시에서 깨달았다고 한다.


“에이, 이제부터는 내 마음대로 할래. 내가 왜 남들이 하는 걸 하고 있는 거지?”


그 후 20년 동안 전흥수 작가는 자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작업했다.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얼마나 많은데, 얼마나 굉장한 가능성들이 있는데, 왜 그저 찍고 현상하여 보여주는 전통의 방식만 고집하는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는 것.


 
“이번 전시도 이렇게 사진으로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여요. 사진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고정관념을 깨뜨리면 무궁무진하게 재미있을 수 있거든요.”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힘주어 말한 대목은 사진의 변신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이제는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거의 대부분을 카메라가 알아서 해결해주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반문한다. 적어도 전문가라면 남과 다른 예술가라면 일반인들도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 일반 아마추어들이 더 잘하기도 하는 종목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나만의 독자적인 세계, 온리원(only one)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전흥수, 충주호-1, Chungju Lake, 100x160cm, digital print, 2017


“90년대에 암실에서 내가 원하는 작품을 한 점 만들어내기까지 대충 6시간이 걸렸어요. 톤을 분리하고 색을 입히고 드로잉을 하던 고행이 컴퓨터로 옮겨오면서 훨씬 다양하고 자유롭게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런데 참 묘하죠. 놀라운 수준으로 시스템이 발전하여 굉장히 편리해지긴 했는데 작업시간은 여전히 6시간 그 이상을 꼼짝없이 매달려야 해요. 디지털은 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으니 여전히 긴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전흥수 작가는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과정은 남들과 마찬가지지만 그 후의 작업에서 독창성을 마음껏 발휘한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 사진을 많이 찍는다. 국내외에서, 산과 도시에서 날것 그대로여도 무방할 정도의 사진을 찍지만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거기에 그의 숨결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을 그의 표현대로 마우스를 잡은 손가락에 관절염이 생기도록 수행하는 것이다. 그 결과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풍경사진이 탄생했다.


앞으로 작업은 디지로그


 

Ⓒ전흥수, 나무-2, tree image, chromogenic print, 1992

 
지금 전시 중인 작업에 이어 새롭게 시도할 작품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인 ‘디지로그’의 프로세스로 전개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작품에 실크프린트를 하여 두께를 올리거나 디지털 페인팅을 수작업으로 그려 넣어 디지털이지만 아날로그 이상의 느낌을 주는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것이다. 처음에 필름작업으로 시작하여 디지털로, 다시 아날로그로 순환되는 프로세스를 통해 더 풍부하고 깊이 있고 독특한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디지털 테크닉을 따라잡고 그 노하우를 쌓음으로써 응용이 가능하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와 마주칠 때, 바로 그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며 손을 뗄 수 없는 것이 디지털 작업이라고 그는 말한다. 너무나 많은 가능성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에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궁극에는 나만의 데이터가 생긴다는 것. 물론 회화와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 똑같은 작품을 만들 수는 없지만 저장된 데이터를 통하여 이젠 어느 정도 결과를 예측하며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다시 아날로그적인 요소를 덧붙이는 새로운 시도를 할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루어 놓은 것에 안주하지 않고 늘 떠나는 그의 방랑자적 기질이 항상 새로운 작업을 시도하게 만드는 바탕인 것 같다.


“떠나는 것에 익숙해요. 예전부터 새벽에 일어나서 문득 설악산이 궁금하면 그 길로 차를 몰고 동쪽으로 달려갔어요. 떠나기 전 준비물 같은 거 상관하지 않거든요.”


 

Ⓒ전흥수, 서울-2, Seoul, Korea, 40x60cm, digital print, 2017
 


작업에서도 그렇다. 지금까지 해온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결국 오늘의 이 지점은 과거의 데이터가 쌓여서 존재하는 좌표이므로 설사 떠난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하더라도 과거의 그 지점은 아니다. 나무가 한곳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나무 안에 세월의 흐름을 따라 나이테가 하나씩 그려지듯 어제와 똑같지는 않은 것이다. 아마 작가의 향후 디지로그의 세계도 그러할 것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화하고 거기에 다시 아날로그를 적용한다 하여도 그것은 진화이지 회귀일 수는 없다.


1992년 그의 나무 사진을 보면 더욱 확연하다. 디지털 이전의 시대여서 암실에서 작업한 작품이다. 그런데 25년이 흘러 디지털로 작업한 오늘의 작업과 맥을 같이한다. 25년의 간격은 기법으로는 천지차이인데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성은 (당연하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나무든 꽃이든 산이든 작가의 미적 감수성으로 해석한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나무는. 그 산은, 세상에 없는 색깔을 보여주고 있지만 얼마든지 우리가 가슴으로 보고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색이다. 무릉도원이 있다면 그곳의 나무는 저런 색이고 그곳의 산은 저런 모습인 걸까, 결국 이 작품들은 작가가 꿈꾸는 산수화이고 작가의 무릉도원인 셈이다.


이만하면 됐어!

 

Ⓒ전흥수, 뉴욕-2, New York, USA, 120x71cm, digital print, 2017


전흥수 작가는 이번 전시가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30년을 달려온 질주를 잠시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은 후 새해부터는 작업에서나 삶에서나 더 여유를 찾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맹렬하게 시도해온 여러 실험들의 결과물에 인색하지 않은 점수를 주면서 더 완숙한 단계로 나아갈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이제 교수로서나 작가로서나 이만하면 됐어, 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지금까지 쌓은 노하우로 이젠 큰 걸음을 걸어야지요. 버릴 건 버리고 놓을 건 놓고 비울 차례인 것 같아요.”


이제 막 60대로 접어든 전흥수 교수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수없이 낯선 길을 헤매다 막 광장에 도착한 사람처럼 이젠 길을 잃지 않을 자신감이 엿보이는 아주 편안하고 홀가분한 분위기가 풍긴다. 이제 잠시 광장의 긴 의자에 앉아 구두끈을 고쳐 매고나면 아마도 그는 온 길을 뒤돌아보지 않고 또 휘휘 떠나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도전할 새로운 길을 향하여


 
글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아트스페이스J

해당 기사는 2017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