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재갑


사진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아주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볼 수는 있는 것일까? 
한강 다리의 난간에 쓰인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글귀가 세상에 등을 돌리려던 누군가의 발길을 돌려세울지 모른다는 정도의 작은 희망일지라도 사진가 이재갑, 그는 사진을 통하여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아니,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혼혈인-내안의 또 다른 초상”1997년, 93년 2월 경기도 파주시 선유리 어머니와 김종철


빌린 박씨, 치열한 삶의 궤적

누구나 태어나면서 당연하게 부여받는 성씨, 그러나 그것조차 빌려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여 섣부른 선입견은 갖지 말자. 편협한 세상과 맞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연민이 역린일 수 있다. “빌린 박씨”라는 이재갑 사진전의 제목을 접했을 때 우선 그 냉소적이고 역설적인 제목이 서늘했다. 흔히 아는 ‘밀양 박씨’가 아니라 생경하기 이를 데 없는 ‘빌린 박씨’라니... 


 

“빌린 박씨” 2018년, 2009년 8월 14일 서울 아산병원 숨소리조차 아파하는 것 같다. 형수님이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사진가 이재갑은 20대 중반인 1992년부터 혼혈인을 찍기 시작하면서 “나는 빌린 박씨다.”라고 당당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박근식 씨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더 깊숙하게 혼혈인의 실상을 접하게 되면서 앞으로 20년간 이 작업을 지속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느새 20년을 훌쩍 넘기게 되었고 해피엔딩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빌린 박씨’가 세상을 떠났으니 어차피 해피엔딩은 글렀다. 사실 작가는 진즉에 “혼혈인-내 안의 또 다른 초상”(1997년), “또 하나의 한국인”(2006년)이라는 전시를 통하여 혼혈인에 관한 문제를 세상에 알린 바가 있다. 그러나 이 작업의 꼭지점에 있는 빌린 박씨, 그의 삶의 궤적을 통해 혼혈인의 현주소를 보여주고자 계획한 전시는 2009년 주인공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무려 9년이 지난 2018년 9월에야 뜻을 이뤘다.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형님(빌린 박씨)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형님이 생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거든요. 당신의 돈으로 전시하지 말라. 꼭 공공기관의 후원으로 해라. 그런 여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하지마라.”  


아마 이재갑 작가가 형님이라 부르는 박근식씨는 사진가의 돈으로 전시한다는 것도 싫었겠지만 그보다 공적인 개념에서 자신들의 문제가 다루어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당국이 무관심하여 후원하지 않을 전시라면 굳이 자신들의 문제를 세상에 내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이재갑 작가는 2012년 이후 네 번이나 전시지원 요청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런데 올봄 우연하게 류가헌에서 빌린 박씨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밀양 박씨, 박미경 관장이 공공자금 후원을 받게끔 힘을 실어주어 전시가 성사되었다.


“형님이 돌아가신 지 9년 만에야 약속을 지키게 되었어요. 그런데 형수님이 전시 이야기를 듣더니 그러대요. 좋은데 싫다.”
좋은데 싫다는 모순된 말이 내포한 여러 겹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너무 늦었지만 다행이란 말일까? 아니면 이런 전시를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혼혈인의 문제가 이 사회에 녹아들지 못했다는 현실증명이므로 거북하다는 말일까. 작가는 빌린 박씨만이 아니라 자신보다 연장자인 다른 혼혈인들도 형님으로 호칭했다. 자연스럽게 형님 아우 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가족처럼 친해진 결과다. 그가 진정성 있는 사진들을 내놓을 수 있게 된 배경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피사체와 일체가 될 정도로 한 주제를 아주 징그럽도록 오래 오래 끌어안기 말이다.


한 주제로 20년 작업


 

“무대뒤의 차거운 풍경”1991년, 1990년 4월 대구시민회관 삐에로분장을 한 인물
 

사진가 이재갑(1966~ )의 첫 개인전은 1991년에 대구 동아갤러리에서 연 “무대 뒤의 차가운 풍경”이었다. 그때가 스물여섯 살, 첫 개인전으로는 매우 빠른 출발이었다. 그런데 전시경력만 빠른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갖추어야 할 인생에 대한 이해, 저 깊숙한 속내에 대한 깨달음에서도 빨랐다.

 

“무대뒤의 차거운 풍경”1991년, 1990년 대구 시민회관 손동작


“아르바이트로 무대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다가 무대 뒤를 보게 되었습니다. 무대의 막 하나 사이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할까요. 제가 비교적 속말, 속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어리바리한 사람인데 한 순간에 표면과 이면을 알아버린 느낌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방금 무대에서는 세상을 호령하던 근엄한 왕이었는데 고개를 조아리던 신하가 무대 뒤에서 “야, 물 좀 한 잔 가져와라.”하니까 용포를 입은 채로 “예, 형님!” 하면서 물을 갖다 바치는 걸 보니 뭔가 어색하면서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세상사의 이면을 본 느낌이랄까, 미묘한 기분이 들더라고 했다. 


 
“세상은 눈앞에 보이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는 사실, 그러므로 그 몇 겹의 층을 들여다보는 사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이 혼혈인 작업으로 나타났어요.”


그는 기지촌보다 평범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즉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미군에 의한 성폭력 등으로 태어난 피해자들을 위주로 촬영했다. 태어난 경위야 어찌되었든 일단 확연히 다른 외모로 인하여 차별을 받는 숙명을 감내해야 했던 그들. ‘빌린 박씨’도 그런 경우였다. 아버지를 모르니 어머니의 성씨를 빌려왔는데 훗날 그가 자신을 ‘빌린 박씨’라고 말하게 되는 이유다. 그에게 성을 빌려준 밀양 박씨 어머니는 끝내 속세를 등지고 비구니가 되었다.


빌린 박씨는 1970년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슴에 품고 자살을 시도했다. 1950년 전쟁 중에 태어났으니 겨우 스물한 살 청년이었다. 그 사건은 우리 사회의 혼혈인 문제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다행히 목숨을 건진 박근식 씨는 그 이후부터 자신과 처지가 같은 이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했다. 한국혼혈인협회를 만들었고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회장을 맡아 희망의 불씨를 피워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양평에 혼혈인 공동체마을을 조성하여 함께 농사지으며 살려고 땅도 사고 준비를 하던 중 정말 갑자기 말기암 판정을 받게 되어 예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어요. 혼혈인들에게는 큰 형님 같은 분이었는데... ”


이 땅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하는 한국인인데도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 차별을 받아야 했던 잔인한 현실에도 슬퍼하거나 낙담하기보다 당당하게 살고자 했던 한 인간을 통하여 이재갑 작가는 우리 사회의 이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속내를 보여준다. 한편, 혼혈인 작업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오랜 시간 공 들이고 있는 또 하나의 작업은 역사의 상처를 보듬는 사진이다. 혼혈인 작업을 하면서 그 뿌리인 한국전쟁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한국전쟁의 뿌리를 캐다보니 일제강점기와 맞닿았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찾아 아픈 상처와 마주한 작업이 “식민지의 잔영”(2000년), “일본 속 한국풍경”(2010년), “상처 위로 핀 풀꽃”(2011년)”, 그리고 2017년 전시한 “군함도” 등의 전시로 발표되었다. 


역사의 상처, 군함도

 

“군함도” 2017, 2008년 7월 나가사키 군함도 지옥계단


혼혈인이 전쟁이 남긴 상처라면 군함도는 일제강점기의 상처다. 소설과 영화로도 잘 알려진 군함도는 조선인들이 일제강점기에 끌려가 해저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한 지옥의 섬이다. 1996년부터 이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는 군함도 외에도 일본을 자전거로 돌면서 식민지시대의 잔재를 추적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꾸준히 지속했다. 


“이 작업을 하면서 아프다는 소리도 못하고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어떤 식으로든 이들의 상처를 알리고 어루만져주는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또한 나의 이런 작업을 도와주는 일본인들을 만나면서 사람이 문제를 만들지만 또한 문제를 푸는 것도 역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일본인 하야시 에이다이 같은 분은 일본인이면서도 일본이 한국인에게 남긴 상처를 고발하고 기록을 모으고 책을 펴내는 일을 평생토록 했다고 한다. 이재갑 작가도 그분을 통하여 많은 정보를 얻고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분은 “역사는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며 귀한 자료를 보여주고 사진촬영에 필요한 정보를 주었다. 그리고 군함도에서 자칫 유실될 수 있었을 노무자수첩이라든지 조선인명부 같은 것을 발견하여 보관함으로써 역사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게 했다.


“그분을 통하여 사람이 희망임을 느꼈어요. 사람에게 절망하다가도 결국 사람이 희망임을 느끼곤 합니다.”


흑백으로 작업하던 이재갑 작가는 군함도에서는 채도가 낮은 컬러사진으로 바뀌었다. 흑백사진은 과거의 시간이라는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되는 현재진행형임을 강조하고자 컬러를 썼다. 일본 당국은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강제노역의 흑역사도 함께 기재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고, 중국과 미국인에게는 강제노역을 사과하면서 우리에게는 아직 사과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에게 군함도는 과거가 아니라 청산되지 않은 현재일 수밖에 없다. 



 

“군함도” 2017, 2008년 7월 나가사키 지옥 섬 군함도(하시마)

 
컬러이긴 하지만 아주 낮은 채도로 인해 군함도는 거의 흑백사진처럼 보인다. 어둡고 음울한 분위기로 인해 아직도 그 공간에 원혼이 맴돌고 있음을,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폐허가 된 공간이지만 풀과 나무와 건물의 잔해 속에서 유령처럼 사람의 그림자가 얼씬거리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군함도 이외에도 이재갑 작가가 보여주는 “상처 위로 핀 풀꽃” 같은 식민지 잔재에 대한 기록사진은 아직 치유되지 않은 지난 역사의 상처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끝나지 않은 역사의 상처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2015년, 2012년 8월 베트남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 학살(1966)이 일어난 꺼우 마을에 세워진 위령비
 

우리가 일본에 받을 빚이 있다면 베트남인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있다.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2015년)은 베트남에서 한국 군인에 의해 학살이 자행된 마을을 찾아다니며 촬영한 사진들이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먹고살 것도 없는 형편에서도 살아남은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결코 잊지 말자며 세운 기억의 탑이라니 베트남인들의 원한과 상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마을을 찾아가면 그들의 눈빛이 싸늘하고 학살현장에서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핏빛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데 이 사진들을 한국에서 전시하자 이번에는 월남전 참전용사들로부터 험악한 반응이 나왔어요. 그러나 이건 우리가 청산해야 할 역사의 상처라는 나의 생각에 동조해주는 분들도 있어 감사했습니다.”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2015년, 2012년 8월 베트남 꽝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사 빈호아 학살(1996) 증오비

 
장교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분의 딸은 국가에서 받는 유족연금을 베트남에 장학금으로 꼬박꼬박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동참하고자 함이었다.


“월남전이라는 하나의 전쟁을 두고 월남인들의 기억을 촬영했으니 이번에는 우리의 기억을 촬영하려고 해요. 국내에 있는 80여 개의 베트남 참전비를 촬영하려고요.”


 

사진 곽명우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30년을 사진가로 살면서 이재갑 작가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주제는 삶이라는 무대의 뒤편, 승자의 기록으로 점철되기 마련인 역사의 상처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개인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외침이다.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작업을 일관되게 해오는 사이 사진가 이재갑도 20대 청년에서 50대 장년이 되어 더 깊어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사진가 이재갑은 자신을 소심한 성격이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사실이 진실인 줄 알았던 숙맥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을 모아 공동 작업을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작업은 고되고 힘든데 비해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너무 멀어 포기하려는 사진가들과 함께 나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조개가 진주를 품듯이 오랫동안 아프게 품어서 작업을 완성시키는 그의 사진이 귀한 것은 대상 속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서 그들과 부대끼고 공감하며 그 속내를 어루만지고 나서야 사진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보통 한 주제를 정하면 20년씩 걸리는 것이리라. 그 긴 시간의 숙성만큼 진정성이 비례하기에 이재갑, 그의 사진은 사실이면서 동시에 진실이 되는 것 같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이재갑 작가


해당 기사는 2019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