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외작가 ⦁ ⦁ William Klein | 밀접한 접촉의 파격
- 2025-01-02 11:35:47


Candy Store, Amsterdam Avenue, New York, 1954 ⓒEstate of William Klein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1926~2022)의 《DEAR FOLKS》(5.24~9.17)가 뮤지엄한미에서 작가 사후 첫 유고전의 형식으로 열리고 있다. 윌리엄 클라인이 1950년대 초부터 시작한 회화에서부터 포토그램 빈티지 프린트와 다큐멘터리, 패션 사진,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한 총 130여 점의 작품이 8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전시되었다. 50여 년 동안 화가, 스트리트 사진가, 패션 사진가, 디자이너, 책 편집자, 집필가, 다큐멘터리 및 장편 영화제작자로 전방위적 예술가로서의 삶과 그 진면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방대한 자료를 총망라한 대규모 전시이다.


Lettrist Painting, 1960 ⓒEstate of William Klein

Gun1(1954), 퐁피두센터에서의 회고전(2005)의 도록 표지와 포스터로 사용한 페인티드 콘택트, 2005, ⓒEstate of William Klein
황홀한 추상
1926년 뉴욕에서 헝가리계 이민 2세로 태어난 클라인은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지만,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드나들며 사진과 회화,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하며 안목을 키워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대 중반 18세에 군에 입대하여 유럽전선에 배속되었고, 중동전에 참전했다가 파리에서 제대했다. 1947년 21살의 클라인은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추상화가인 앨즈워스 켈리(Ellsworth Kelly)를 만나게 되어 색면추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스위스의 건축가 막스 빌(Max Bill)과 라슬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 Nagy) 등 바우하우스 작가들에게 매료되었다. 1948년에 그는 입체주의 회화의 거장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의 스튜디오에서 잠시 일하게 되었고, 이때 레제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 있었고 클라인은 스승인 레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청년 화가 시절 윌리엄 클라인은 인상파, 세잔, 피카소를 좋아했다. 클라인은 레제의 작업에서 현대의 차가운 기술 공학을 받아들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기의 조형적 건축에서는 그 차분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50년 전시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게 되었고 이탈리아 건축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대형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흑백으로 구성한 작품을 연결해서 움직이도록 설치한 작품인데, 이번 전시가 시작되는 첫 번째 섹션에 회전하는 형태로 전시되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p.50) 당시 작업한 추상 작품들은 이탈리아 대표적인 디자인 잡지 「Domus」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클라인은 회화, 포토그램, 설치 작품, 무대 미술 등, 이미 거의 모든 시각적인 표현이 미치는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종합예술가였다.
1926년 뉴욕에서 헝가리계 이민 2세로 태어난 클라인은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했지만,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을 자주 드나들며 사진과 회화, 아방가르드 예술을 접하며 안목을 키워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대 중반 18세에 군에 입대하여 유럽전선에 배속되었고, 중동전에 참전했다가 파리에서 제대했다. 1947년 21살의 클라인은 파리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추상화가인 앨즈워스 켈리(Ellsworth Kelly)를 만나게 되어 색면추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스위스의 건축가 막스 빌(Max Bill)과 라슬로 모홀리나기(Laszlo Moholy Nagy) 등 바우하우스 작가들에게 매료되었다. 1948년에 그는 입체주의 회화의 거장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의 스튜디오에서 잠시 일하게 되었고, 이때 레제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 있었고 클라인은 스승인 레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청년 화가 시절 윌리엄 클라인은 인상파, 세잔, 피카소를 좋아했다. 클라인은 레제의 작업에서 현대의 차가운 기술 공학을 받아들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기의 조형적 건축에서는 그 차분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50년 전시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가게 되었고 이탈리아 건축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대형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흑백으로 구성한 작품을 연결해서 움직이도록 설치한 작품인데, 이번 전시가 시작되는 첫 번째 섹션에 회전하는 형태로 전시되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p.50) 당시 작업한 추상 작품들은 이탈리아 대표적인 디자인 잡지 「Domus」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클라인은 회화, 포토그램, 설치 작품, 무대 미술 등, 이미 거의 모든 시각적인 표현이 미치는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는 종합예술가였다.


Antonia + Simone + Barbershop, New York for Vogue, 1962 ⓒEstate of William Klein
흑백의 몬드리안
윌리엄 클라인이 카메라로 촬영한 첫 흑백사진은라는 제목의 사진으로 몬드리안의 영향이 계기가 되었다. 1952년 클라인은 몬드리안도 자주 방문했던 네덜란드 발헤렌 섬의 농가에 머물면서 농가의 외부의 선과 기하학적인 구조를 흑백사진으로 촬영했다.(p.49) 이 작품이 전시된 맞은 편에는 그가 평소 좋아했고 영향을 받았던 사진가 워커 에반스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사진 분야에서는 루이스 하인(Lewis Hine)과 같은 농업안정국(FSA) 사진가들의 작품을 좋아했고, 특히 워커 에반스(Walker Evans)의 직설적인 도큐멘트를 좋아했다. 그러나 50년대 유럽 사진의 감정적, 시적 조류는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사진적 취향은 훗날 스트리트 사진에서 뿐 아니라 패션 사진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진을 매체로 이용한 클라인의 작업은 몬드리안의 추상적 이미지 이후의 사진에서 단도직입적이고 과감한 다큐멘터리적인 접근 방식으로 사회적 이슈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작가적 관점을 명징하게 드러내게 된다.
윌리엄 클라인이 카메라로 촬영한 첫 흑백사진은


Antonia and mirrors, Paris for Vogue, 1963 ⓒEstate of William Klein

Models Backstage, Op-Art, Qui etes-vous Polly Maggoo?, 1966 ⓒEstate of William Klein
뉴욕
1954년, 패션잡지 『보그(Vogue)』의 아트디렉터인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berman)이 파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클라인의 회화 작업을 보고 뉴욕 보그에서의 디자인 작업을 제안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잡지를 위한 디자인 작업으로 시작했지만 이내 촬영에서 암실 작업까지 사진 작업을 자유롭게 하게 되면서 뉴욕의 도큐멘트 작업을 시작한다. 클라인은 미국 출생이었지만 주로 유럽에서 활동했고, 유럽의 현대 예술가의 관점으로 자신의 고향인 뉴욕을 촬영하게 된 것이다.
클라인은 군중과 거리를 두지 않고 그들 속 한가운데로 들어가 도시의 개개인을 적나라하게 사진으로 드러냈다. 밀집된 현대 도시의 군중의 익명성을 강조하기보다 정면으로 렌즈를 응시하는 도발적인 시선(p.41), 또는 무아지경에 빠진 듯한 사람들을 밀착해서 직접적으로 접촉한 파격적인 작가적 관점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마치 진짜 총이라도 겨누는 듯한 소년의 표정은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연극적이고 더 나아가 폭력적이다. (p.43) 그 눈빛에서 볼 수 있듯이 클라인은 관찰자의 시선을 넘어 대상과의 접촉(밀착)의 방식을 통해 그 장면의 중심, 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거리가 없었으며 격식과 모든 상식을 넘어선 작가의 시선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도시 속의 여러 기호들로 치장된 단편적 이미지를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냈는데, 그것들은 주로 광고와 간판, 숫자, 이름, 빛, 인물 등 파편화된 문명의 단면을 드러내고자 했다. 뉴욕이라는 도시를 보여주기 위한 그의 미학적 기준은 뉴욕 데일리 뉴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인정사정없는 레이아웃과 요란한 헤드라인, 그리고 난폭하고 무례하기 이를 데 없이 잉크가 번져있는 타블로이드처럼 통속적인 뉴욕과 같은 스타일의 사진집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 바램은 곧 프랑스에서의 출판으로 실현되었다. 『Life is Good & Good for You in New York: Trance Witness Revels』라는 타이틀의 기념비적인 사진집을 제작하게 된다. 이 초판본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는데, 그 한권이 뉴욕 사진의 대표작들과 함께 사진집의 목업(실물 모형) 일부 등의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클라인이 직접 손으로 그려 디테일하게 만든 목업을 보면 얼마나 그가 이 사진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그의 세심하고 완벽주의적인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다. (p.51) 출판 당시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출판하게 되어 성공을 거두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그의 파격적인 시각이 비판받았고 출판되지 않았다.


그의 추상 작업 앞에서 윌리엄 클라인, c. 1952 ⓒEstate of William Klein

Barn on Walcheren Island (where Mondrian lived), Zeeland, Holland, 1952 ⓒEstate of William Klein
도시의 사진집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초청으로 영화 촬영장에서 일하게 된 클라인은 이후 『로마』, 『모스크바』, 『도쿄』 세 도시의 사진집을 출판했으며 가장 오래 그가 살았던 『파리』의 사진집도 출판하고 도시 시리즈의 사진집도 제작했다. 사진가로서뿐 아니라 북 디자이너로서 클라인의 뛰어난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도시의 간판을 촬영한 작업을 통해 조형적 잠재력을 사진과 영상으로 네오-다다, 아방가르드한 방식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레트리즘 회화
1960년대 초반에는 레트리즘 회화를 선보였는데, 대형 사이즈에 그려진 클라인의 레트리즘 회화는 클로즈업으로 찍은 뉴욕, 로마, 도쿄의 간판을연상시킨다. 제2차세계대전 말 이시도르 이주(Isidore Isou)에 의해 프랑스에서 시작한 레트리즘 문화 운동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뿌리를 두고 말의 뜻보다는 소리의 시학, 글자가 들려주는 음악을 강조했다. 클라인의 레트리즘 회화는 글자와 다른 시각적인 상징을 통해 그의 급진적인 예술적 독창성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p.42)
패션
윌리엄 클라인의 급진적인 예술적 독창성은 패션 사진에서도 발현되었다. 1955년부터 10년간 『보그(Vogue)』와의 협업에는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berman)과 알렉세이 보르도비치(Alexey Brodovitch)와 같은 유럽의 아방가르드 교육을 받았던 패션잡지 아트디렉터의 지지 속에서 창작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모델의 분열적 이미지를 통해 정체성에 관한 문제 의식을 패션사진으로 표현했다. (p.46) 모델을 거리로 데리고 나가서 있는 현실과의 대비를 표현하고(p.45) 모델을 둘러싼 대중의 얼굴을 지우는 사회적 이슈를 반영해 나갔다. 이러한 패션 시스템에 대한 클라인의 비평적 관점과 ‘스펙터클 사회’는 그의 첫 장편 영화인의 주제이기도 했다. 이 영화로 클라인은 프랑스의 권위 있는 영화상인 1967년에 장 비고 상(Prix Jean Vigo)을 수상했다.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초청으로 영화 촬영장에서 일하게 된 클라인은 이후 『로마』, 『모스크바』, 『도쿄』 세 도시의 사진집을 출판했으며 가장 오래 그가 살았던 『파리』의 사진집도 출판하고 도시 시리즈의 사진집도 제작했다. 사진가로서뿐 아니라 북 디자이너로서 클라인의 뛰어난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도시의 간판을 촬영한 작업을 통해 조형적 잠재력을 사진과 영상으로 네오-다다, 아방가르드한 방식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레트리즘 회화
1960년대 초반에는 레트리즘 회화를 선보였는데, 대형 사이즈에 그려진 클라인의 레트리즘 회화는 클로즈업으로 찍은 뉴욕, 로마, 도쿄의 간판을연상시킨다. 제2차세계대전 말 이시도르 이주(Isidore Isou)에 의해 프랑스에서 시작한 레트리즘 문화 운동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에 뿌리를 두고 말의 뜻보다는 소리의 시학, 글자가 들려주는 음악을 강조했다. 클라인의 레트리즘 회화는 글자와 다른 시각적인 상징을 통해 그의 급진적인 예술적 독창성을 과감하게 표현했다. (p.42)
패션
윌리엄 클라인의 급진적인 예술적 독창성은 패션 사진에서도 발현되었다. 1955년부터 10년간 『보그(Vogue)』와의 협업에는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berman)과 알렉세이 보르도비치(Alexey Brodovitch)와 같은 유럽의 아방가르드 교육을 받았던 패션잡지 아트디렉터의 지지 속에서 창작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모델의 분열적 이미지를 통해 정체성에 관한 문제 의식을 패션사진으로 표현했다. (p.46) 모델을 거리로 데리고 나가서 있는 현실과의 대비를 표현하고(p.45) 모델을 둘러싼 대중의 얼굴을 지우는 사회적 이슈를 반영해 나갔다. 이러한 패션 시스템에 대한 클라인의 비평적 관점과 ‘스펙터클 사회’는 그의 첫 장편 영화인


윌리엄 클라인 전시 전경_황홀한 추상


「뉴욕」 초판본 목업
페인티드 콘텍트(Painted Contact)
1990년대 작업한 <페인티드 콘택트(Painted Contact)> 사진의 밀착인화 프린트를 확대하고 그 위에 그림을 덧대어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p.43) 초기 회화의 기하학적 이미지를 소환하고 재창조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온 그의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윌리엄 클라인은 현대 사진을 비롯한 현대 영상 미학의 시발점에 선 예술가로서, 회화, 디자인, 사진, 패션, 영화, 책 등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기존의 규칙과 금기, 한계를 초월했다. 그의 작업의 독창성과 파격은 기존 시각예술의 전통과 미학의 판도를 전복시켰다.
영화
클라인은 어렸을 때부터 뉴욕과 파리의 영화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갔다.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예술가로서 넓은 영역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지만 영화로의 진출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TV디렉터로서 몇 차례 좌절을 겪다가 픽션과 다큐멘터리, 단편, 중편, 장편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총 21편 제작했다. 영화와 TV라는 대중매체의 매커니즘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구성하는 혼성적인 작품을 통해 미국의 헤게모니를 비판하며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등 현대 사회를 예리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표현했다.
뮤지엄한미에서의 전시 《DEAR FOLKS》를 통해 일부 작품에만 국한되어 알려진 클라인의 작업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을 체계적으로 충실하게 구성한 이번 전시를 통해 다양한 매체의 조합과 재창조의 방식으로 작가의 시대적 정신을 반영한 그의 작업 전체를 압축해서 관람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2005년에는 파리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에서 클라인의 사진, 회화, 영화에 대한 대대적인 회고전을 열었으며, 2012년에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클라인은 그의 생애 마지막 날까지 계속 전시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이번 전시의 준비를 위해서도 2015년부터 뮤지엄한미와 협업하며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2022년 9월 10일, 생을 마감하게 되어 아쉽게도 윌리엄 클라인을 직접 만날 수 없었지만, 클라인과 30여 년간 협업해 온 스튜디오 매니저, 피에르-루이 드니(Pierre-Louis Denis)와 객원 큐레이터 라파엘 스토팽(Raphaëlle Stopin)이 이번 전시를 위해 직접 내한하고 세미나를 열어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글 박민경 편집부 차장
해당 기사는 2023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1990년대 작업한 <페인티드 콘택트(Painted Contact)> 사진의 밀착인화 프린트를 확대하고 그 위에 그림을 덧대어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p.43) 초기 회화의 기하학적 이미지를 소환하고 재창조하면서 끊임없이 진화해온 그의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윌리엄 클라인은 현대 사진을 비롯한 현대 영상 미학의 시발점에 선 예술가로서, 회화, 디자인, 사진, 패션, 영화, 책 등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기존의 규칙과 금기, 한계를 초월했다. 그의 작업의 독창성과 파격은 기존 시각예술의 전통과 미학의 판도를 전복시켰다.
영화
클라인은 어렸을 때부터 뉴욕과 파리의 영화도서관을 자주 드나들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갔다. 다양한 매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예술가로서 넓은 영역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었지만 영화로의 진출이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TV디렉터로서 몇 차례 좌절을 겪다가 픽션과 다큐멘터리, 단편, 중편, 장편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총 21편 제작했다. 영화와 TV라는 대중매체의 매커니즘을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구성하는 혼성적인 작품을 통해 미국의 헤게모니를 비판하며 정치적 메시지를 담는 등 현대 사회를 예리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표현했다.
뮤지엄한미에서의 전시 《DEAR FOLKS》를 통해 일부 작품에만 국한되어 알려진 클라인의 작업은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전 생애에
걸친 작품을 체계적으로 충실하게 구성한 이번 전시를 통해 다양한 매체의 조합과 재창조의 방식으로 작가의 시대적 정신을 반영한 그의 작업 전체를 압축해서 관람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2005년에는 파리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에서 클라인의 사진, 회화, 영화에 대한 대대적인 회고전을 열었으며, 2012년에는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클라인은 그의 생애 마지막 날까지 계속 전시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이번 전시의 준비를 위해서도 2015년부터 뮤지엄한미와 협업하며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2022년 9월 10일, 생을 마감하게 되어 아쉽게도 윌리엄 클라인을 직접 만날 수 없었지만, 클라인과 30여 년간 협업해 온 스튜디오 매니저, 피에르-루이 드니(Pierre-Louis Denis)와 객원 큐레이터 라파엘 스토팽(Raphaëlle Stopin)이 이번 전시를 위해 직접 내한하고 세미나를 열어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글 박민경 편집부 차장
해당 기사는 2023년 7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