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빈 집에 가득 담긴 그리움, 박기호

사람들이 떠나고 폐허가 된 사진을 보며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 했다. 주민들이 정든 삶터에서 밀려나간 뒤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피폐된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방식은 이제까지 대부분 고발의 목청이 높은 경직된 것이었다.
그런데 박기호 작가는 마치 누군가 흘리고 간 보석을 줍듯이 한때 그곳에서 삶을 가꾸며 살던 사람들의 흔적을 소중하게 들춰내 보여줌으로써 아름답다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후 Silent Boundaries" 통일로 Tongil-ro. 2013


그 이후에 남겨진 더 많은 이야기들

통상, 지나간 것은 그리워진다. 박기호 작가의 최근 작업인 “그 이후”는 벌써 제목 자체가 그리움이란 감정을 동반한다. ‘그 이후’는 자동적으로 ‘그 이전’을 전제하므로 이미 지나가버린 ‘그 이전’에 대한 온갖 기억과 흔적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솜씨 좋은 사진가는 타고난 미감으로 낡고 지저분하고 흉물스러워 보일 법한 것들조차 그리움으로 채색하여 명화를 보여주듯이 정성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한미사진미술관 전시장

 
올 가을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그 이후 Silent Boundaries>(8.25-10.20)는 박기호 작가가 2013년부터 4년 동안 돈의문, 북아현동, 미아동, 길음동 등지의 재개발 지역을 촬영한 사진들이다. 한 가족의 안식처로서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켜켜이 쌓였을 공간이지만 이주 후 버리고 떠난 쓸모없는 물건들과 좋았던 시절을 유추해볼 작은 단서들만 남아 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는 옛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적막하고 텅 빈 공간에서 작가는 ‘나간 사람들’의 추억을 하나씩 줍고 있다. 

 
"그 이후 Silent Boundaries" 돈의문 Donuimun, 2013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잔잔한 꽃무늬 도배지, 폐자재 그득한 마당에 핀 나팔꽃 한 무더기, 과거엔 꽃을 가득 피웠을 빈 화분, 날마다 식구들의 얼굴을 비추었을 오래 된 거울, 위태롭게 금이 간 담벼락... 작가의 눈길을 머물게 한 이 소재들은 그의 어릴 적 기억과 무관치 않다. 열세 살에 미국으로 떠나기 전 정릉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보물찾기 하듯 추억 한 자락을 찾아내는 작가에게 그곳은 향수어린 공간이었다. 그래선지 그것들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시선은 참 편안하고 다정하다. 그의 재개발 사진들이 쓸쓸함 대신 질박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발견한 작가의 반가움은 한지 프린트와 족자형식의 디스플레이로 귀결되었다. 한지는 스미어 품어주는 특성으로 사진가가 담아온 현장을 튀지 않는 순한 색감으로 다독거린다. 그리고 전시장 천정에서 내려온 줄에 의지해 늘어뜨린 족자형식의 한지 프린트는 전시장 조명이 투과하면서 앞에서 보나 뒤에서 보나 비슷하여 표면과 이면의 구별을 약화시켜버린다. 앞과 뒤, 전과 후를 굳이 구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대단한 예술가 집안의 특별한 DNA

사진가 박기호(1960~ )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예술가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가족력(family history)을 갖고 있다. 아버지는 힘찬 터치로 이 땅의 명산을 그린 박고석 화백(1917-2002)이고 어머니는 이화여대 미술대학 출신인 패션디자이너로 건축가 김수근 선생(1931-1986)의 누님이다. 학창시절에 형제들도 다 그림을 잘 그려 줄줄이 상을 타오는데 막내인 박기호만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간 그에게 어머니가 사준 카메라는 숨어 있던 그의 예술적 ‘끼’를 불러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사진을 공부하고 1987년에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타임, 포브스 같은 외신의 사진기자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사진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20년 동안 외신기자로 일하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고 상업사진을 병행하였으나 50을 앞둔 나이에 돌연 잘 나가던 일을 그만두고 미국의 모교로 공부하러 떠났다.


“다시 가난한 학생신분이 되어 봉고차 같은 걸 끌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내 눈을 사로잡은 게 빈 가게였어요.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 이후 빈 가게가 참 많았거든요. 일일이 부동산에 전화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할 수 없어서 상점의 유리창에 카메라를 바짝 대고 내부를 촬영하곤 했어요.”


 

"Everything Must Go" Exit, Wheeling, 2009


"Everything Must Go" Ducts, Las Vegas 2009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상업사진가로 상황을 마음대로 컨트롤하고 재구성했던 그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연출 불가능의 갑갑함을 받아들이자 대신에 사물을 수용하는 노하우가 생겼다. 작가의 의지대로 화면구성을 했던 것에서 벗어나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것을 들을 수 있게 되더라는 것. 그렇게 촬영하여 대학원 졸업 작품으로 “Everything Must Go"를 전시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 그 주제가 귀국 후 철거를 앞둔 빈 집으로 이어질지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귀국한 뒤 충정로에 살면서 거의 날마다 그 일대를 산책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산책길에 ‘쨍그랑’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뭔가 하고 살펴보니 빈 집에서 새시를 떼 가려고 유리창을 깨고 있었어요. 순간, 빈 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Silent Boundaries" 돈의문 Donuimun, 2013
 

빈 집에 대한 관심은 돈의문에서 북아현동 미아동 길음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아예 철거대상인 집을 세내어 그곳에 살면서 촬영을 시작했다. 미국의 빈 가게에서 서울의 빈 집으로 대상이 바뀐 것. 특히 정릉에서 아버지가 직접 지은 판자집에서 살았던 그는 미아동 길음동 일대에서 자신이 살던 집과 흡사한 집을 발견하고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감정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살았던 정릉 집이 헐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에 아쉬움을 갖고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1960년대 내가 살던 집의 구조와 비슷한 집들이 몇 채 있었어요. 어렸을 적에 형과 다락에 올라가서 방바닥으로 뛰어내리면 어머니가 구들장 무너진다고 혼내셨거든요. 빈 집의 다락을 보니 그런 추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어요.”


그는 촬영을 통해 시간 거스르기를 체험한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들이 빈 집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빈집도 곧 철거되어 사라질 것이니 ‘그 이후’는 그의 사진 속에서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아버지와 외삼촌 그리고 스승

초등학교 때로 기억한다고 했다. 온 식구가 설악산으로 가족여행을 갔다. 아버지는 산에 한 시간 정도 오르면 걸음을 멈추고 산과 대화를 나누라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산과 대화를 나누라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 그저 빨리 산꼭대기로 올라가고만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그 말씀을 나이 오십을 넘겨서야 깨닫게 되었어요. 빈 집을 촬영하면서 오래 앉아서 사물을 바라보니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게 느껴졌어요. 때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라고 말하는 듯해요. 여러 번 찾아가서 같은 사물을 보는데도 셔터를 누를 어떤 한 순간이 확 다가와요. 아버지가 산에 가시면 한 순간 여러 장의 그림을 휙휙 그리시다가 어떤 때는 사나흘 머물면서 스케치북을 꺼내지도 않으셨던 이유를 이해했어요.”


미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 방학이 되면 외삼촌인 김수근 건축가의 사무실 ‘공간’에서 인턴으로 일한다고 들락거렸는데 외삼촌이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 사진을 찍어오라고 시키셨다고 한다. 사진학과 학생으로 자신만만하게 나섰는데 곧 건축사진을 찍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진을 보신 외삼촌이 제게 빛에 대한 이야기, 건축물의 왜곡에 대한 지적을 해주시는데 그때는 겨우 ‘난 절대 건축사진은 안 찍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비록 철거될 낡고 허물어진 집이긴 하지만 건축물을 찍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물론 왜곡을 바로잡을 줄도 알게 되었고 30년 전과 비교할 수 없게 달라졌지만 비로소 외삼촌이 설명해주셨던 말들이 되새겨졌다.


 
박기호와 브루스 데이비슨

“아버지와 외삼촌은 제 인생의 멘토셨지만 브루스 데이비슨 선생님은 제 사진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십니다. 그분에게서 사진에 대한 열정과 연출력, 끈질긴 집념을 배우고 익혔어요.”


1984년부터 86년까지 그의 조수로 일하면서 사진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기술적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고 사진을 대하는 자세, 무엇보다 현장을 사로잡는 연출력과 카리스마, 그 엄청난 에너지와 끈기는 끔찍할 정도였지만 그 배움이 그를 사진가로 지탱해준 밑천이었음을 두고두고 감사하게 된다고.


“얼마나 끈질기신지 몇 날 며칠을 촬영현장에서 녹초가 되도록 일하고 주말에 돌아왔는데 다음날 휴일 아침 8시에 전화가 와요. 스튜디오에서 일하자는 전화지요. 20대 중반인 나는 피곤하기도 하고 실은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그래서 전화를 안 받아보기도 했어요. 노인네가 왜 그렇게 체력이 좋으냐고 투덜대면서. 그런데 어떻게 혼자 하시게 두겠어요. 결국 스튜디오로 나가지요.” 


스승이 일하는데 젊은 제자가 놀 수 없으니 달려가게 되고, 그러다보니 박기호 작가도 서울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조수들로부터 ‘지독한 선생님’이란 불평을 샀을 법 하다. 대신에 그는 철저하게 일을 해주는 사진가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데이비슨 선생님과는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아요. 며칠 전 여름방학이 끝나고 미국으로 가는 아들 편에 이번 전시 사진집을 보냈어요. 왜냐면 제가 지금의 아들 나이에 선생님 조수로 일했으니 선생님이 제 아들을 보면 추억에 잠기고 반가워하실 것 같아서요.”


예술가 집안의 타고난 DNA만이 아니라 좋은 스승까지 만난 그를 행운아라고만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한두 달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조수생활을 만 2년 넘게 견디며 스승의 애정 어린 신뢰를 얻어낸 그의 노력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30년 만에 드디어 사진을 하는 느낌 

외신기자로 상업사진가로 바삐 살면서 놓쳤던 것들이 많았음을 비로소 깨닫는다고 말하는 박기호 작가. 그는 “30년 만에 드디어 사진 찍는 걸 배웠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그에게 아주 기분 좋은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그의 깨달음의 핵심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진의 주인공은 사진가가 아니라 피사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자세로 이어졌다.


 
"그 이후 Silent Boundaries" 북아현동 Bugahyeon-dong, 2015


“사진은 그곳에 살면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동네에 사니까 매일 조금씩 변하는 게 보여요. 마당에 부서진 목재들만 가득하던 그곳에 어느 날 나팔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날마다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를 다 알아챌 수 있거든요.”


예전 같으면 눈에 거슬리면 치우고 촬영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후 작업을 통해 지워버릴 것들도 전체적인 톤을 제외하고는 인위적인 손길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변형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것. 원형대로, 세월의 손때가 묻은 대로,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나의 사진은 철거촌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기보다 그곳에 대한 나의 애착과 추억을 표현하고 싶은 거였어요.”


원형 그대로라고 말하지만 그가 원형 그대로를 한지 프린트로 살리기 위해서 얼마나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모른다. 작가 특유의 독창적인 한지 프린트를 만들어내기까지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 작가가 사물을 본 순간 느꼈던 그 감정을 그대로 간직하여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수고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작가에게 다음 작업을 묻자 즉각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도 자연스럽게 꽂힐 다음 주제를 기다릴 뿐이라는 것. 이젠 무엇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마음을 툭 건드려줄 ‘무엇’을 기다린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살아온 것도 그러했던 것 같다고, 자신의 의지대로 산 줄 알았는데 많은 인연들이 얽히는 속에서 받아들이고 반응하며 여기에 이른 것 같다고 한다. 물론 젊은 날에는 귀 기울일 줄 몰라서 놓친 게 허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을 여유와 진지한 자세를 갖추고 있는 이상 그의 감성을 자극할 소재들은 세상에 무궁할 것이다. 그의 다음 작업은 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박기호 작가


해당 기사는 2019년 10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