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보이는 것 너머에 주목하다, 심상만

심상만 “연엽蓮葉” 초대전
절정, 그 후에 남겨진 것들


 

ⓒ심상만


절정의 뒤끝은 두렵다. 아니, 절정의 순간도 그러하다. 가장 극적으로 피어오른 바로 그 순간은 동시에 쇠락을 암시하는 순간이기도 해서 절정은 숙명적으로 비장미(悲壯美)를 내포한다. 심상만 작가의 “연엽”은 화려한 공연이 끝난 후 무대 뒤편의 휑한 어두움 같기도 하고, 절정의 날들을 다 보내고 인생의 뒤안길에서 모든 걸 덜어낸 구도자의 모습 같기도 하다. 작가가 아름답게 핀 화려한 연꽃 대신 연잎, 그마저도 물 위에 드러난 싱싱한 초록 대신 물속에 잠겨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퇴락한 연잎에 초점을 맞춘 것은 절정의 눈부신 유혹 뒤의 오랜 침묵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월 6일까지 ‘KT&G 상상마당 춘천 갤러리’에 가면 연잎의 나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물과 안개의 도시 춘천


 

ⓒ심상만
 

춘천에 가면 김승옥 작가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이 떠오른다. 안개 때문이다. 무진기행의 배경은 김승옥 작가가 성장기를 보낸 전남 순천이지만 강원도 춘천이어도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춘천 역시 짙은 안개의 도시다. 아름다운 호수에서 마치 김이 피어오르듯 물안개가 피어올라 시야를 막막하게 가리면 순식간에 현실은 안개처럼 희미해져버리고, 조금 더 자신을 풀어놓아도 좋을 것 같은 몽롱함을 느끼게 된다. 어룽어룽한 유리창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듯 오리무중을 자주 경험할 수 있는 춘천에서 산다는 것이 작가에겐 어떤 의미일까.


심상만 작가가 그동안 발표해온 사진들을 살펴보면 작품이 그의 삶의 터전과 깊이 관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주로 도시풍경을 조형적이며 감각적으로 표현했던 초기의 작품들은 그가 대도시 서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러나 점차 그의 사진에서 도시의 화려한 색감이 빠지고 구도를 중시하는 조형미가 뒤로 숨으면서 본격적으로 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물의 도시 춘천에 정착했음을 드러내주는 신호다.


 

ⓒ심상만
 

2005년에 <결-바람에 얹혀서>에서 2016년 <내 안의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는 본격적으로 물을 소재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처음에는 물을 미학적으로 형상화 하는 작업에 몰두했지만 그 후 물을 오브제가 아니라 사유와 탐구의 대상으로 전환했다. 표피적으로 물의 형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창조주가 창조한 물, 생명의 시원(始原)으로서 물을 바라본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직접 바다로 가서 촬영하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상상의 바다를 만들었다. 대형 수조를 제작해 그 안에서 유리공에 물을 담아 회전시키는 행위만으로도 얼마든지 폭풍우 몰아치는 밤바다, 우주 빅뱅을 보는듯한 광활하고 무한한 공간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한 <연엽>에서는 인공적인 연출에서 다시 자연의 세계로 돌아왔다. 그리고 에너지 넘치는 물의 세계가 아니라 조용하게 침잠하는 물속의 세계를 보여준다. 작가는 들끓는 내 안의 바다를 지나 침묵의 깊은 못, 심연으로 들어간 것 같다. 그렇지만 결국 강(결-바람에 얹혀서)과 바다(내안의 바다), 그리고 호수(연엽)로 이어지는 그의 작업은 ‘물’이라는 공통어로 집약된다.


쇠락해가는 연엽의 상징성


 

ⓒ심상만


작가는 자신이 연 사진을 찍게 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너무나 많은 사진가들이 연꽃을 찍는다는 점에서도 내키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색채가 짙은 꽃이란 점에서도 탐탁하지 않았다. 40년 이상 사진을 찍었지만 연꽃에 별다른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는 심상만 작가. 그러나 인연은 비켜갈 수 없는 모양이다.


“한 마디로 너무나 진부한 소재여서 내가 연을 찍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최근 2, 3년 사이에 이상하게 연과 자주 인연이 닿으면서 나도 모르게 연의 세계에 빠져들었어요.”


 

ⓒ심상만
 

그는 프랑스에 갔을 때 파리 근교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정원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한다. 모네의 유명한 그림인 수련 연작이 탄생한 연못이지만 그곳에 핀 연꽃 자체가 그의 관심을 끌진 않았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어느 날 춘천의 안개 낀 호숫가에서 꽃이 지고 난 후의 연잎을 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수없이 보았겠지요. 그런데 그날따라 잡초와 어우러진 야생의 연잎이 쿵 하고 감정을 건드리는 거였어요. 자욱한 안개 탓이었는지 나이 탓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우리네 삶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문득 남들과 다른 각도로 연잎을 찍어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자세히 보고 오래 들여다보니 연잎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관상용으로 잘 가꾸어진 연못에서 군락을 이룬 보기 좋은 연꽃이 아니라 야생으로 호수 가장자리에서 잡초들과 섞여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연잎은 언뜻 보기에 여느 잡초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오히려 작가의 감성을 건드린 것.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그래서 저 혼자 쓸쓸히 삶을 소진한 후 진흙 속으로 사라질 그 마지막 삶의 여정이 가슴에 와 닿았다.

 

ⓒ심상만


아마 그가 절정이 지난 그 후의 삶에 남보다 더 예민하게 감응한 것은 주변에서 오래 친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뜨는 일을 자주 겪게 되면서였을 것이다. 다양한 삶과 죽음을 접하게 되면서 “자기 길을 가지 못하고 타인에 의한 길을 가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고 한다. 물론 본인이 걷고 싶었던 길을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의지가 부족하거나 주변 환경에 휘둘리다가, 또는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진정한 나의 삶’을 살지 못하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하게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때 비로소 회한과 후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돌아서기에는 너무 늦어 더욱 안타깝기 마련이다. 그런 안타까움을 자주 목도하면서 그는 오히려 전성기 이후의 삶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정작 꽃이 피어 있는 시간은 짧고 그 후의 시간이 훨씬 긴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동안 너무 꽃에만 집중했던 것이 아닐까.


춘천을 사랑하는 사진가

 

심상만 작가


심상만 작가는 젊었을 적부터 사업을 시작하여 아직도 사진과 사업을 병행하고 있지만 사진가로 불리기를 원한다. 지난겨울의 ‘바다’전시에 이어 올봄에 ‘연엽’전을 열었고, 후반기에는 프랑스에서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7월 18일부터 춘천시 문화예술회관에서 서울의 사진가들과 춘천 출신 사진가들을 초대하는 대규모 사진전의 기획을 맡았고, 가을에는 미술의 전 장르를 아우르는 강원도 작가들의 서울전시를 추진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진짜 걷고 싶은 길은 사진가의 길이므로 사업은 생업이고 사진이 나의 길입니다. 이번에 연엽 전시는 내 고장에서 하는 전시이므로 더 열심히 하고 싶었습니다.”


20대 말에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미국여행을 하면서 처음으로 카메라를 사서 기념촬영을 하게 된 것이 시초였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와 취미로 사진을 하면서 공모전에도 내고 그랬는데 이상하게 낼 때마다 큰 상을 받게 되더라는 것. 1982년에는 동아국제사진살롱에서 은상을 받기도 하면서 점차 서울의 사진가들과 교류가 활발해졌고 마침내 1985년에 서울 관훈동 파인힐 갤러리에서 <판타지아>라는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사진의 유혹에 푹 빠져든 것이다.

 
“그렇지만 진짜 나다운 내 사진을 하게 된 것은 2000년 이후인 것 같아요. 특히 2000년에 들어서서 영월의 동강국제사진제 출범에 관여하고 지금까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진적인 눈이 성숙해졌어요. 이제는 내가 갈 사진의 길이 분명해졌습니다.”


춘천을 사랑하는 그는 지역의 작가로서 강원도 사진가들과 함께 발전하고 싶고 그런 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그저 내가 사는 곳에서 평범한 사진가로, 사진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기억되면 족하다는 것이다.

 
“유명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전시는 내가 나를 가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이 전시를 통해 앞으로 내 사진이 갈 길을 가늠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도 한때 사진에 미친 세월이 있었다. 열정적으로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사진의 보폭을 넓히고자 애썼던 시절이 있어 오늘의 그를 사진가로 만들었지만 지금은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알고 있다고 했다. 더불어 나아가는 것, 춘천이 사랑하는 사진가로 남는 것, 아니 춘천을 사랑한 사진가로 남는 것이다.

 
“해외 여러 도시들도 가보았지만 춘천처럼 아름다운 도시가 흔치 않아요. 이 아름다운 춘천에서 작업을 못한다면 어디서 하겠어요! 내 작업의 원천은 춘천입니다.”


ⓒ심상만


강과 호수와 바다에서 강물의 속살거림과 바다의 용트림과 호수의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이제 그는 물의 속살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소양호와 의암호, 북한강에서 자라는 연을 훑어보며 예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야생의 처절한 뒷모습을 본 것이다.


그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연엽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흐린 날의 구름이 담겨 있기도 하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수면 위 풍경이 그림자로 비치기도 한다. 그리고 좋은 날을 다 보낸 물속 연엽은 수면 위 추억을 뒤로 하고 그저 한낱 잡초들과 얽혀 있는 듯 없는 듯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님을 또한 보여준다. 모든 게 소멸한 것 같은 죽음 너머로 또다시 손톱만큼 작은 연잎이 솟아나오는 사진을 통하여 삶은 무한히 반복되고 있음을, 절망은 끝이 아니고 희망의 시작이라는 메시지를 듣는다.


아마 뒤를 돌아볼 줄 아는 나이가 되면 연엽 사진을 통해서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살아가면서 눈부신 꽃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물속에는 하늘도 있고 바람도 있고 산(山)그림자도 있듯이 삶의 정답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과연 클로드 모네가 지베르니에서 수련 연작 수백 점을 그려냈듯이 심상만 작가도 춘천의 호수에서 그의 연엽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발전시켜 나갈지 기대가 크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제공 : 심상만 작가

해당 기사는 2017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