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전]게리 힐, 찰나의 흔적 Momentombs

게리 힐의 전시 〈게리 힐: 찰나의 흔적 Gary Hill: Momentombs〉(2019.11.26-2020.3.8)이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조각가로 예술 활동을 시작한 게리 힐은 1970년대 초부터 소리와 비디오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후기 구조주의를 개척한 문인이자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1988년 “재난의 발생(Incidents of Catastrophe)”을 제작했으며, 이후 “관람자(Viewer)”, “석궁(Crossbow)”, “벽면 작품(Wall Piece)”, “장소의 주인(Place Holder)” 등 다양한 매체 실험을 지속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작가가 1981년부터 2019년까지 지난 40여 년간 작업한 작품 중 24점을 선정해 전시한다. 작품 전시와 함께 ‘아카이브 & 미디어 룸’을 조성해 70년대부터 작업한 작품 36점을 볼 수 있는 미디어 아카이브와 작가 인터뷰 영상 및 작가 소개가 담긴 국내외 도서를 비치해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


 
관람자, 1996, 5채널 비디오 설치, 무음, 약 14m, 크램릭 컬렉션 소장


언어 예술가, 게리 힐

전시 제목 ‘Momentombs’ 는 Moment(찰나 ), Momentum(가속도), Tomb(무덤)의 합성어로 작가가 관람객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품 속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소리는 시간에 따라 분해와 원상 복귀, 소멸과 탄생을 반복한다. 어느 ‘찰나’에 사라진 언어와 이미지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어떤 장소, ‘무덤’으로 표현되는 가상공간을 차지한다. 그곳에서 언어와 이미지의 명확하고 단일한 기존 의미는 해체되고, 분리된 애매모호한 의미들은 조화를 이루지 않고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긴장을 ‘가속화’한다. 세 가지의 단어를 합해 모호한 의미의 언어를 만들듯, 안정된 의미의 질서를 파괴하는 그의 작품은 어느 하나의 의미로 통합할 수 없다. 24점의 작품은 언어와 이미지, 신체와 과학 기술, 가상과 실재의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고정된 의미를 향한 구속을 거부한다.


게리 힐은 본인을 소개하는 명칭으로 다수의 사람이 ‘비디오 아티스트’로 부르는 것에 반대해 ‘언어 예술가’(Language Artist)로 달리 표현해주기를 미술관 측에 요청했다. 작가는 사회화된 언어의 폐쇄적인 단일성을 지양하고 언어의 역사성을 지향해 의미의 해체를 시도한다. 언어의 역사성이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어의 소리와 의미가 변하거나 문법 요소가 변화하는 특성을 뜻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언어와 이미지, 신체와 과학기술, 가상과 실재의 의미는 해체되어 단일성을 잃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예를 들어, ‘사과’를 말할 때 사전적 의미로 합의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개인의 경험과 해석에 기댈수밖에 없다. 각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과’의 맛, 색, 형태 등은 단일할 수 없다. 또한 개인의 나이가 듦에 따라 머릿속에 지닌 기존 ‘사과’의 요소는 변화한다. 언어로서 ‘사과’를 해체하고 요소의 무수한 차이를 탐구하듯, 작가는 익숙한 것을 해체하여 범주의 구분이 무너진 새롭고 낯선 관념을 탐험한다.


언어와 이미지, 신체와 과학기술, 가상과 실재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이미지임을 믿는다, 복합매체 설치,
1991-1992, 약 4.6×6.1m, 프랑스 샤토 드 로슈슈아르 - 오트-비엔 현대 미술관 소장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I Believe it is an Image in Light of the Other)”는 일곱 개의 원통형 튜브가 천장에 매달려 바닥에 펼쳐진 책을 바라보는 형태로 전시공간을 이룬다. 공간은 사방이 막혀있고, 어두워 앞을 보기가 어렵다. 유일한 광원은 각 튜브가 발하는 가상의 이미지이며 아래 빈 책과 이미 인쇄된 책에 크기와 동일하게 맞춰져 있다. 튜브는 모리스 블랑쇼의 『최후의 인간(Le Dernier Homme)』(1957)의 발췌문, 얼굴, 손, 의자 등의 이미지를 비춘다.


한 튜브가 빈 책 위로 비추는 블랑쇼의 글, 즉 가상의 이미지는 읽을 수 있지만(언어를 알고 있다면), 빛을 받지 못하는 실제 인쇄된 책은 보이지 않아 읽을 수 없다. 책은 기존의 기능을 잃고 이미지를 비추는 화면으로 활용된다. 또 다른 튜브는 인쇄된 책 위에 두 개의 얼굴을 비춘다. 언어와 이미지가 동시에 보이는 책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언어에 집중하면 얼굴이 흐릿해지고, 얼굴을 보면 언어를 읽을 수 없다. 심지어 언어는 얼굴 그림자에 가려 내용이 끊긴다. 전달 기능을 잃어버린 언어는 모양만 남은 채 백지 위 그림으로 인식된다. 가상 이미지와 그림으로 보이는 실재 언어가 무엇이 다를까. 뒤섞인 의미는 관람객의 머릿속에 애매모호한 인상만을 남긴다. 또 다른 튜브는 책을 문지르는 손을 비춘다. 동시에 어디선가 책을 문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관람객의 눈과 귀는 가상을 보고 가상을 듣는다. 어둡고 막힌 전시공간에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상이다. 그렇다면 관람객은 가상 안으로 들어온 것일까. 자신의 신체를 만지며 확인할 수밖에 없다.


 

폭뢰 Depth Charge, 2009, 2012,
복합매체, 가변크기, 작가소장


“폭뢰(Depth Charge)”는 바닥에 놓인 5개의 비디오에 약에 취한 작가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작품에서 작가는 제정신이 아닌 채 무의식적으로 답이 없는 철학 이야기를 내뱉는다. 작가는 하나의 이상적인 순수한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환각제 따위의 약을 먹고 바닥에 쓰러질 만큼 의식이 몽롱해진 상태는 작가가 원하는 의식이 해체된 모습이다. 작가는 비디오에 의해 또 해체되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모습을 나중에야 비디오로 확인한다. 작가는 “즐기기 위해 마신 것이 아니라 사고에 대한 고찰을 위해 실험을 해봤다”며 “바닥에 어지럽게 늘어선 전선들은 정신세계의 회로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소의 주인, 2019, 단채널 HD 비디오, 다채널 오디오, 14분 14초,
작가와 리아 루마 갤러리 소장, 밀라노



장소의 주인, 2019, 단채널 HD 비디오, 다채널 오디오, 14분 14초, 
가와 리아 루마 갤러리 소장, 밀라노


“장소의 주인(Place Holder)”은 총 14분 14초 동안 재생하는 작품이다. 실물 크기의 작가가 작품에 등장해 동전을 튕겨 올리는 행동을 떨어뜨릴 때까지 반복한다. 동전을 튕기는 소리와 손이 부딪히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13분 정도가 지나면 동전은 작가의 손에서 벗어나 땅으로 떨어져 구른다. 작가는 동전을 찾기 위해 카메라 프레임을 벗어나고, 화면은 텅 빈 검은 공간만 남는다. 이때 동전이 구르는 소리가 관람객 주변을 흐른다. 회전력을 잃을 때까지 공간 주변을 배회하는 가상의 소리는 관람객의 관심을 끈다. 관람객은 소리를 쫓아 있지도 않은 동전을 찾다가 다시 1분가량 유지되는 검은 화면을 응시한다. 작가가 사라진 검은 화면에는 희미한 관람객의 모습이 비친다. 어느 순간부터 있던 것일까. 가상의 소리를 쫓다보니 따라 들어간 것일까. ‘그’의 시선은 미술관에 있는 관람객을 향한다. 14분 14초 동안 관람객은 미술관에 있었을까, 화면 안에 있었을까. 장소의 주인은 누구일까. 무엇이 가상이고 객체이며, 무엇이 실상이고 주체일까. 가상의 소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영상은 처음부터 되풀이한다.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의미를 해체하는 과정이 무의미를 추구하고 허무를 느끼는 일은 아니다. 단 하나의 완성을 좇지 않는 작가는 범주의 구분이 무너진 경계 어딘가를 탐험한다. 관람객은 단일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언어, 이미지, 소리의 차이를 작가와 함께 탐구하고, 체험하며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과정을 즐길 수 있다.


게리 힐(Gary Hill, 1951~ )은 개인전 〈Video Viewpoints〉(뉴욕, MoMA, 1980), 〈Gary Hill: Primarily Speaking, 1981-83〉(뉴욕, 휘트니미술관, 1983), 〈Gary Hill: Between Cinema and a Hard Place〉(파리, OCO Espace d'art contemporain, 1991), 〈Gary Hill: Viewer〉(모스크바, GMG Gallery, 2010)을 개최했다.


 
글 장영수 기자
이미지 제공 수원시립미술관


해당 기사는 2020년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