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우리의 근원을 짚어내는 사진가, 이갑철

타인의 땅에서 발원, 우리의 영혼까지 흔드는 바람의 사진집

 

ⓒ이갑철


바람이 분다. 처음엔 머리카락 몇 올 흐트러트리지만 점차 옷깃을 여미게 하고 몸을 흔들어놓더니 이어 영혼까지 두드린다. 모든 ‘시작’은 대부분 미미하다. 그러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예언이 있을 만큼 모든 시작은 또한 위대하다. 그래서 누군가의 처음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 서면 늘 가슴이 떨린다. 중간에 다른 길로 들어섰다면, 막다른 길이라고 돌아서고 말았다면 지금 이 순간이 없었을 그 어느 날의 시작. 이갑철의 『검은 바람』의 시원(始原)을 더듬어보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작가가 이 땅의 산하를 거칠 것 없이 쏘다니면서 때로는 시린 가슴으로 가끔은 벅찬 경이로움으로 끌어안고 동화되고 토해낸 거친 호흡이 사진집 『검은 바람』이다. 올해로 그가 첫 개인전을 시작한 지 벌써 33년이 되었다.


이갑철 
우리의 근원을 짚어내는 사진가


신명과 한의 공존  


 

​ⓒ이갑철


 
대상과 카메라 사이에는 반드시 물리적인 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바라봄과 바라보임의 사이엔 간격이 있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너는 거기 있었고 나는 여기에 있다”는 대상과 사진가의 거리감이 앞질러 전달되기 때문에 좀처럼 한 작가의 내공의 깊이가 온전히 스며든 사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이갑철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산을 찍었으되 뻗쳐오르는 기운이 산보다 먼저 확 다가오고, 꽃나무를 찍었으되 어여쁜 꽃보다 겨우내 딱딱해진 나무 등걸을 뚫고나온 봄의 원초적인 생명력이 먼저 시야를 덮친다. 그의 사진에서 넘치는 기운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형상보다 정신이 압도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가 이갑철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갑철


 
그의 사진 속에선 구름조차 무심히 흐르지 않고, 구름을 뚫고 나는 새는 ‘자기가 왜 날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나는 것’ 같다. 햇볕을 받아 물결이 눈부시게 출렁거리고 바람에 이리저리 숲이 부대끼고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그리고 꽃이 피어나는, 우리가 수없이 보아왔을 평범한 풍경이 그의 사진 속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이 아니라 뭔가 저마다 말을 내뱉고 꿈틀거리며 응집되었던 기운을 쏟아낸다. 자연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하늘과 숲과 바위와 물이 숨을 쉬는 생명체임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날것의 거침없는 호흡을 느끼게 하는 그의 사진은 생생한 에너지와 짝을 이루기 어려운 뭉클한 슬픔 한 덩이를 동시에 피어 올린다. 신명과 한(恨)의 공존이다. 흔히 그의 사진을 가장 한국적인, 또는 가장 우리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사진이라고 평하는 기저에는 우리 민족의 공통된 정서인, 모순된 이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분출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산마루에 지는 해가 지구 반대편에선 힘차게 솟구치며 하루를 여는 새벽의 해이듯 그의 사진에서 신명과 한은 한 몸이다. 


마음을 비워 사진을 얻는다 


 

​ⓒ이갑철

사진가 이갑철은 사진이라는 화두를 놓고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도승 같다. 사실 그의 하루는 스님의 생활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아침에 일어나 차를 마시고 향을 피워 마음을 가라앉히며 주로 불교서적을 읽는다. 책을 읽다가 딱 들어오는 화두가 생기면 그것을 잡고 음미하며 두세 시간 산행을 한다. 앎을 체화시키기 위하여 명상과 몸 쓰기를 함께한다. 그렇게 자신을 가다듬고 비우는 작업을 하다가 문득, ‛여기 며칠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일어나면 카메라를 들고 선선히 집을 나선다. 사진을 찍으러 나서기 전 몸과 마음을 풀고 내려놓는 일을 선행하는 것이다.

 
‛사진을 찍다 보면 무의식 상태에 도달할 때가 있는데 그런 정신적 단계가 얼마나 기분 좋은지 몰라요. 나의 그런 경지가 이미지로 나타나면 물론 좋지만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을 가져요.’

 

​ⓒ이갑철


집을 떠나기 전에 이미 넉넉하게 마음을 비워놓았으니 채울 일만 남았다. 그러나 애써 채우지 못해도 그뿐이라는 것.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전에는 사진을 찍으면서 ‛좋은 사진을 찍어야지’라고 숙제처럼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사진이 삶 자체가 되었다고 했다.

 
 “사진 아니면 뭘 하겠어요! 사진이 내게는 그냥 숨 쉬는 일상입니다. 특별히 다른 할 일도 없고요. 사진 찍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할까, 가장 편안하다고 할까. 그냥 좋아요.”


사진이 숨을 쉬는 일처럼 자연스럽고 숨을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삶이 되었으니 또한 그에게 사진은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니다.


“젊었을 적에는 삶도 있고 작업도 있었다면 지금은 삶이 작업이고 작업이 삶이 되었어요. 두 가지가 합일되어버렸어요 어느새.”
그러나 작업이 삶과 일치되기까지 사진가로서 살아온 지난날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가 살아내야 하는 생활과 지켜주어야 할 가족이 있었으니 이 땅에서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혹독한 환경과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사진에 인생을 거는 사람도 드물고 진정한 사진의 선생을 만나기도 어려운 속에서 홀로 작업하는 작가의 길은 아득했다. 다른 젊은 작가들도 직면할 이 문제를 어떻게 돌파해왔느냐고 물었다.


 
“자존심이었지요.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흔들림 없이 걸어왔어요. 그런데 죽지 않더라고요.”


말끝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의 계곡을 건넌 사람이 보이는 여유였다.


사진가로 살아온 33년 


 

​ⓒ이갑철


소년시절 그의 희망은 축산학과 진학이었다고 한다. 경남 진주의 시골 출신이긴 해도 좀 의외였다. 그런데 그 이유가 마음이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들썩거리고 부잡스러워야 자연스러운 나이에 ‘안정된 삶’을 원했다는 말이 낯설게 다가왔다.

 
“목동이 되고 싶었어요. 등대지기라든가 섬마을 선생님도 좋고, 아마 혼자에 끌렸던 것 같아요.”


그런 성향이 카메라와 만났다. 방앗간 집 아들로 비교적 넉넉했던 그에게 카메라가 생겼다. 어려서 성악과 그림에도 소질을 보였던 그는 금세 사진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신구대학교 사진과 진학으로 이어졌다. 비로소 사진과 제대로 대면하게 된 것. 카르티에-브레송을 알게 되면서 라이카를 샀고 군대를 다녀와 복학해서는 ‛처절하게 사진을 해보자. 칼 같이 살아보자.’ 결심했다. 그리고 사진과를 졸업한 해인 1984년에 첫 전시 <거리의 양키들>을 서울 한마당화랑에서 선보였다. 사진가 이갑철의 신고식이었다. 
그 후 <타인의 땅>(1988년 전시)이 첫 전시의 연장선상이었다면 2002년 금호미술관에서 전시한 <충돌과 반동>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8, 90년대 젊은 사진가로서 관심을 가질만한 시대정신을 보여주었던 그가 2000년대라는 새로운 세기에 걸맞게 대변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20세기와 21세기의 경계선에서 확연히 달라진 이갑철 작가에게 호평이 쏟아졌다. 20년 가까운 세월에 단단해진 작가의식으로 사진이 사진을 넘어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사진가 이갑철. 이어지는 2007년 <에너지전>(한미미술관)은 점점 깊어져가는 그의 정신세계를 더 적극적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틈틈이 30여 년 작업을 보여주는 전시와 책 출간이 이어졌는데 이번에 출판된 『검은 바람』은 기존의 작품과 새로운 작품을 뭉뚱그려서 편집자가 자신의 마음의 흐름에 따라 직관으로 고르고 배열한 책인데 작가 또한 그 흐름에 공감할 수 있어 별 이의를 달지 않았다고 말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우리 땅에 찍을 게 너무 많아요. 드러난 것만 보니까 찍을 게 없다는 말이 나오지요. 최근에는 겨울산을 찍는데, 그러다 보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4권의 책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갑철의 『검은 바람』 사진집


책 제목도 사뭇 시적(詩的)이다. 봄은 “난난분” 여름은 “파(波)” 가을은 이미 출간된 “가을에”, 그리고 겨울은 “적막강산”이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는 ‘난난분’은 아름다움과 슬픔의 극치이고, 여름은 거센 파도처럼 역동적인 ‘파’, 그리고 수식어가 필요 없는 시리고 눈부신 ‘가을에’, 이 모든 격정과 슬픔이 사라진 겨울의 고요 ‘적막강산’, 사계절 풍경이기도 하고 인간의 일생을 함축하기도 한다. 적막강산에 고요한 겨울풍경과 스님들의 다비식을 함께 배열하겠다는 작가의 말이 그걸 입증한다. 물론 작가에게 겨울은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풍경인 죽음이 아니다. 적멸이고 사라짐이기도 하지만 윤회이기 때문이다.    
 

“겨울산이 갖는 에너지가 있어요. 나뭇잎은 일면 죽은 듯이 보이지만, 다비식에서 스님도 재가 되어버리지만 스님의 껍데기만 태울 뿐인 것처럼 결국 윤회지요.”

​ⓒ이갑철
 
 
겨울은 적멸의 시간이지만 봄을 부르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적막강산에 이미 난난분과 파도와 가을을 모두 품고 있는 셈이다. 계절이 돌고 돌듯이 삶도 윤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다. 그렇다면 적막강산이 화려한 봄날보다 열정적인 여름보다 눈물겹게 아름다운 가을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작가도 “나이 들어가는 그냥 이대로가 참 좋다.”고 말하듯이 인생에 있어서 겨울도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하리라는 언질을 준다.  


적막강산은 검은 바람과 통한다. 형체도 색깔도 없는 바람에 하필 ‘검은’ 색을 부여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검정이야말로 모든 색이 합쳐진 색, 모든 색을 다 섞으면 나오는 최후의 색이 아닌가. 모든 색깔을 수용하고 통합하여 하나가 된 검정은 고요한 침묵이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블랙홀이다. 적막강산 겨울산은 그에게는 봄여름가을겨울 그 이후의 오계절인 것이고, 적멸과 윤회가 맞물린 세계인 것이다.  


 

 “스님들이 선시를 쓰듯 선(禪)사진을 찍고 싶어요. 하이쿠 시를 좋아하는데 그런 사진이면 좋겠어요. 외국에 나가보면 중국과 일본 사진은 있는데 한국사진은 없거든요. 한국에도 사진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진… 그러려면 나다운 것도 중요하지만 에너지 파이를 키워야지요.”   
 

ⓒ사진예술
 

그는 사진으로 도(道)를 닦는다. 따라서 그의 고민은 선승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상(像)에 결려 넘어지지 않고 상을 넘어 본질로 들어가는 것, 형상을 찍어내는 사진을 하면서 그 형상을 넘어선다는 것은 구도(求道)의 과정이 없다면 쉽게 풀리지 않을 문제다. 그래서 오늘도 작가는 한국인의 원형질, 우리의 공통된 DNA 속 그 무엇을 꺼내려 선승처럼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다. 


모처럼만에 사진에 인생을 건 작가를 만난 날은 매우 사납게 추웠다. 그래서 봄이 오고 있음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이갑철 작가

해당 기사는 2017년 3월호에 소개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