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작가]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Christian Tagliavini), Homage to Renaissance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미술가는 신이 창조한 대상들을 잘 모방하기 위해서는 자연 속에 숨겨진 신비함을 직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직관이 창조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에 대한 탐구, 연구와 분석이 동반돼야한다”고 말했다.

 

1503, Ritratto di giovane donna, 2010Ⓒ Christian Tagliavini, CAMERA WORK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 Christian Tagliavini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처럼 대상을 모방하고, 그 원천을 탐구하고 분석할 뿐만 아니라 재창조한다. 다만 여기서 그가 모방하는 대상은 자연이 아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들을 모방하고 당시의 복식과 오브제를 연구해서 스스로의 상상을 덧붙여 재창작한다. 옛날 화가들에게는 붓과 물감이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카메라와 3D 프린터가 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들의 복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패션을 스케치하고, 그 스케치를 바탕으로 의상부터 모자, 악세사리까지 모든 소품들을 직접 만든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천으로 옷을 직접 만들고, 단추나 모자 부품 같은 개별적인 소품들은 3D 프린터에서 인화해서 나온 모형을 다시 손으로 직접 마감을 다듬고 정교하게 색을 칠한다. 종이처럼 얇고 가벼운 이 플라스틱 모형은 르네상스 시대의 값비싼 장식품으로 감쪽같이 바뀐다.


종이로 만든 세상


 

Car te, La Mat ta Nera, 2012
Ⓒ Christian Tagliavini, CAMERA WORK



Carte, Regina di Quadri, 2012
Ⓒ Christian Tagliavini, CAMERA WORK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Christian Tagliavini는 이탈리아-스위스계 작가로 스위스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찍는 사진을 정교하게 연출하고, 또 사진 속 소품이나 무대를 스스로 제작해 왔다. 특히 의상과 소품을 재현할 때 일반적인 천이나 금속만이 아니라, 종이, 플라스틱 등으로 제작한다. 종이로 만든 집에 종이로 만든 옷을 걸친 모델들을 촬영하는 식이다. Dame di Cartone(2008)에서는 모델들이 입고 있는 옷은 실제 옷이 아니라, 종이판지를 오려서 만들어낸 일종의 가림판이다. 승무원 복이나 트럼프의 여왕 복장 등, 누군가 손으로 슥슥 그려낸 듯한 종이옷을 걸친 인물들은 마치 만화 속 세상에서 걸어 나온 사람 같다. CARTE(2012) 시리즈에서는 트럼프 카드 속의 스페이드 퀸이나 하트 퀸, 다이아몬드 킹 같은 인물 캐릭터를 실제 사람으로 대체해서 연출했다. 여왕봉을 들고 있는 다이아몬드 퀸의 미니스커트와 그물 스타킹이나 젊은 에로스 같은 하트킹의 종이 패션은 위트 넘치는 디자인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르네상스 화가들에 바치는 오마주


 

1406, Aurea, 2017
Ⓒ Christian Tagliavini, CAMERA WORK




1406, Dora da Faltugnano, 2017
Ⓒ Christian Tagliavini, CAMERA WORK

 
작가의 시리즈 중 특히 1503(2010)과 1406(2017)은 앞선 시리즈의 다소 장난스러운 캐릭터와는 달리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의상과 소품을 종이로 섬세하게 구현했다. 인물들은 르네상스 시대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목이 길게 강조된 화려한 러프칼라와 모자는 모두 종이로 만들어졌다. 화려하고 거대한 러프 칼라나, 목을 길게 감싼 악세사리, 손목을 감싼 큼직한 팔찌 등은 르네상스 시대 상류층 의상의 특징이다. 이는 단지 장식용이나 과시용만이 아니라, 정적으로부터 급소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능도 있다.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는 본래라면 값비싼 보석이나 레이스 등으로 제작됐을 이 값비싼 방어구를 종이로 제작하며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1406, Alchimiade, 2017
Ⓒ Christian Tagliavini, CAMERA WORK


작가는 복식사만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사도 깊이 있게 연구했는데, 그의 <1503> 시리즈는 르네상스 미술의 대가 아그놀로 브론치노 Agnolo Bronzino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아그놀로 브론치노는 이탈리아 피렌체파 화가로 16세기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으며, 우아한 화풍의 초상화로 명성을 쌓았다. 메디치가의 궁정화가였던 그는 피렌체의 귀족 초상을 많이 그렸는데, 무표정하고 고상한 표정이나, 결점 없이 매끈한 피부표현, 인위적인 자세 등 특유의 화풍으로 상류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는 아그놀로 브론치노의 초상화에서 다소 거만하고 무표정한 인물들의 표정이나, 냉정하고 차분한 색조, 빛을 통해 은은하게 반사되는 매끈한 피부 표현 등의 스타일을 빌어 왔다. 특히 아그놀로 브론치노는 초상화를 그릴 때 실제 인물보다 목을 더 길게 그리거나, 손가락을 길게 그리는 식으로 약간의 왜곡을 통해 인물의 고상함, 우아함을 더욱 강조했는데,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는 초상사진을 촬영한 후 편집 과정에서 모델들의 목을 실제보다 길게 보이도록 매만졌다. 인체비례에 맞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난 목 때문에, 그의 초상사진은 더더욱 르네상스 시대 아그놀로 브론치노의 초상화를 연상시킨다. 이 시리즈의 제목인 ‘1503’은 아그놀로 브론치노가 태어난 해인 1503년을 뜻한다.


3D 프린터로 완성시킨 르네상스 시대의 패션

 

1406, Alchimiade, 2017
Ⓒ Christian Tagliavini, CAMERA WORK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의 2017년도 신작인 1406 시리즈는 1503보다 100년을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갔다. 이 신작들 역시 르네상스 시대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lippo lippi)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시리즈의 제목인 ‘1406’ 역시도 프라 필리포 리피가 태어난 1406년도를 뜻한다. 프라 필리포 리피는 고딕적인 화풍과 독자적인 표현으로 유명한데, 그는 인물 초상에서 빛을 교차 배치하며 미묘한 명암과 동적인 윤곽선으로 섬세한 정서를 표현했다.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의 1406 시리즈 역시 전작보다 더 자연스러워졌고 빛과 배경의 조화나, 레드, 베이지, 블루 같은 깊은 색상을 한 작품 안에 통일시켜 더욱 차분하게 다층적인 메타포를 전달하고 있다.


작가는 르네상스 시대 의상을 재현하면서도 모자나 헤어 액세사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디자인하고 3D 프린터로 출력했다. 그래서 벨벳이나 실크 등으로 제작된 의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의상 같지만, 모자나 헤어 액세서리는 일종의 조형물이나 건축물을 연상시키며, 마치 미래 공상과학 소설 속 나오는 스타일처럼 이질적이다.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는 사진작가로 전업하기 전, 건축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그 때의 이력이 이런 독창적인 의상 디자인 작업에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는 자신의 작품 모델들을 프로 모델이 아니라, 일반인 지원자 중에서 선택한다. 그는 “프로 모델들의 만들어진 이미지나, 너무 부드럽고 현대적인 용모보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섬세하고 꿈꾸는 듯 한 얼굴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에서 걸어나온 듯, 강인하면서도 우아한 얼굴의 모델들은 그가 꿈꾸는 르네상스에 대한 현대적 오마주를 구현하는 주요한 요소이다. 관객들은 160cm가 넘는 대형사이즈의 이 작품 앞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을 실제로 대면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의 이번 <1406> 시리즈는 독일 베를린의 카메라워크 갤러리(CAMERA WORK)에서 지난 12월부터 오는 2월까지 열리는 개인전에서 처음 공개됐다. 이 시리즈는 독일 전시가 끝난 후 오는 3월부터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Fotografiska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크리스티안 타그리아비니의 작업 과정. 그는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를 참조하여 인물의 의상을 디자인해 스케치하고(사진 1), 3D 프린터로 플라스틱 모형으로 출력한 후(사진 2), 손으로 직접 마감을 다듬어서 (사진 3) 정교한 소품을 제작한다.
 

사진 1


 

사진 2

 
 
사진 3
 

글 석현혜 기자
이미지 제공 Camera Work(camerawork.de)

해당 기사는 2018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