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작가]전문기자의 진지한 인물탐구, 권혁재

사진이 발명된 이래 지금까지 카메라 앞에 가장 자주 노출된 대상은 아마도 사람일 것이다.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향해 셔터를 누른다. 나를 기억하게 하고 싶고 그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인물사진에 대한 만족도는 욕망의 크기와 반비례하기 십상이다. 대상과 사진가,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제3자를 함께 만족시키는 인물사진은 어렵다.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인물의 소망, 사진적으로 뭔가 더 멋지게 해내고 싶은 사진가의 욕심 그리고 선입견 없이 인물사진을 바라볼 제3자의 눈, 그 일치점은 실상 거의 불가능할 터다. 


중앙일보 권혁재 기자는 일찍부터 그 일치점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인물사진을 발표해왔다. 지난 가을에 펴낸 단행본 “권혁재의 비하인드”가 그것이다.


 

장사익, 소리꾼


권혁재 
전문기자의 진지한 인물탐구



수줍은 소년의 꿈 ‘기자’

50대 초반에 진입한 기자의 입에서 ‘부끄럽다’는 단어가 자주 튀어나온다. 혹시 후한 평가라도 나올 기미가 보이면 한사코 두 손을 젓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면 울어버렸다는 수줍은 소년의 심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성격에 기자가 꿈이었다니, 더구나 지금 끊임없이 사람을 카메라 앞에 세우는 사진기자를 하고 있다니, 별로 성격에 맞지 않아 보이는 직업을 갖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묻는 조사를 했는데 ‘기자’라고 썼어요. 당시 경상남도 밀양의 시골에서 아이들의 장래희망은 으레 대통령, 장군, 과학자, 뭐 그런 거였거든요. 무슨 직업이 있는지도 모를 때였으니까요. 그런데 우리 동네에서 기자 아저씨가 부자로 잘 살더라고요. 모든 아이들이 쓰는 걸 쓰고 싶지는 않고 해서 별 생각 없이 그냥 기자라고 썼어요.” 


그런데 그런 독특한 직업을 써낸 학생이 기특했는지 담임선생님이 꼭 안아주시며 귀에 대고 “혁재야, 꼭 기자가 돼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가슴에 안겨 들은 그 속삭임은 끝내 그를 붙잡았다. 밀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면서 ‘신문방송학과’를 지망했다. 그리고 졸업 후 몇 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결국 1994년 경향신문 출판사진부에 입사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그냥 기자를 생각했던 거였어요. 사실 사진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것도 아니었고요. 그런데 출판사진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사진기자로서의 삶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그의 고향집에 세든 가게가 사진관이었다고 한다. 호기심 많은 소년이 들락거리며 인화지에 서서히 상이 떠오르는 신비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사진관 아저씨는 주인집 아들이 소풍을 갈 때마다 카메라를 빌려주었고,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사진 잘 찍는 아이가 되었다. 게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친구가 아마추어 사진가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잠시 잊고 있던 사진에 대한 호기심은 다시 발동되었고 그 친구에게서 사진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놀이 삼아 하던 사진이 입사할 용기는 주었을망정 허점투성이였어요. 사진기자 수습기간 동안 내내 ‘조직을 위해서 그만 두라’는 윗사람의 질책을 받으며 고군분투해야 했습니다.”


 그는 오기로 버티며 밤잠을 자지 않고 선배들의 좋은 사진을 흉내 내고 반복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무사히 6개월 수습의 딱지를 떼고 사진기자로 거듭난 권혁재 기자는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물사진으로 승부를 걸다.


 

김혜자, 배우


어느새 사진기자 20년이 넘었다. 그는 기자로서 두 가지 결심을 했다고 말한다. 평생 진급하지 않고 평기자로 필드에서 뛰겠다는 것과 사람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사진에 치중하겠다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에 서고 싶은 사진기자의 사명감과 욕심에서 비켜서서 그는 왜 인물사진을 고집할까?   

 
“처음엔 나도 기자가 되어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나 내게는 벅찬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보다는 그냥 아름다운 메시지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따뜻한 눈물 한 방울이 세상을 뒤덮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의 가슴을 잠시라도 따뜻하게 적실 수 있다면 보람이 아닐까요.”


굵직한 사건의 중심에 서서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고 또는 화려한 특종을 거머쥐는 짜릿한 쾌감을 탐하지 않고 그는 조용히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길을 택했다. 한 사람의 일생 또한 작은 역사라고 한다면, 그는 사건이 아닌 인물을 통하여 역사를 기록해온 셈이다. 그동안 그의 카메라 앞에 선 사람은 적어도 수천 명은 될 터이니 그는 수천 명의 사연을 사진으로 전한 셈이다.

 
“많은 사람들을 찍으면서 각자의 아픔이 내 사진의 키워드가 되었던 것 같아요. 누구나 평생 살아가면서 후회와 아픔이 있잖아요. 그러나 대개 기자 앞에 서면 잘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 하죠. 당연합니다. 그래서 슬쩍 질문을 통해서 가슴 속 이야기를 끌어내기도 하고, 그런 내밀한 사연이 담긴 모습을 찍어내려고 했어요. 그러기 위해 촬영하기 전에 그 인물에 대한 자료를 많이 찾아봐요. 그래야 그가 보여주려고 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실한 자아가 드러난 모습을 포착할 수 있으니까요.”
 

김영갑, 사진가


그 결과물이 늘 본인의 호응을 받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섭섭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독자를 먼저 염두에 둔다고 했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몸을 아끼지 않고 위험한 모험에 도전하는 ‘달인 김병만’에게서는 어떤 모습을 궁금해 할까? 늘 화면으로 보는 얼굴이 아니라 그런 모험을 해내는 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몸을 사진에 담았다.
 

읽기 위해서 잘 듣는다.

인물사진을 잘 찍는 비법은 없다. 아니, 비법이 있지만 누구나 아는 평범한 내용이다. 권혁재 기자의 인물사진이 인구에 회자되고 그에게 전문기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그의 남다른 ‘듣기 실력’ 덕인지 모른다. 한 사람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는 미리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부하고 무엇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염두에 둔다. 물론 현장에서 상황이 만들어주는 기막힌 순간포착을 놓치지 않는 것은 필수다. 인터뷰를 통하여 그가 세상에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어내고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하는 말을 글 쓰는 취재기자 못지않게 열심히 듣는다. 그때그때 표정도 놓치지 않는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깅수진,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간송미술관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의 뒷모습사진은 매우 인상적이다. 하얀 두루마기에 대나무 잎사귀의 그림자와 그 옆 하얀 진달래꽃. 평생 백 진달래꽃 같은 하얀 한복을 입고 대나무 같이 올곧게 한 길을 걸어왔으니 이 사진 한 장에 그분의 고고하고 깨끗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한 발레리나 강수진 예술감독의 단단한 등 근육 사진은 그녀의 어떤 아름답고 완벽한 발레동작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함축한다. 그뿐인가. 수더분한 할머니로 찍어달라고 주문했다는 이해인 수녀의 인물사진은 더할 나위 없이 겸손하고 평화롭다. 사진 한 장에 오롯하게 담긴 한 사람의 삶. “이것이 인생이다”를 차용한다면 “이것이 사진이다.”

 
“권혁재의 비하인드” 사진집


권혁재 기자의 ‘듣기 실력’은 마침내 ‘쓰기 실력’으로 발전하여 “권혁재의 뒷담화”가 중앙일보 인터넷에서 연재 100회를 기록하며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 결과물로 지난 가을에는 단행본 “권혁재의 비하인드”가 출간되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사진과 함께 정직하게 받아 적은 글이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하고 슬그머니 웃게 만들기도 하는 인터뷰 모음집이다. 각자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짐을 지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진과 글은 그 내용이 가슴 아프고 눈물겨울지라도 읽고 나면 묘하게 가슴에 ‘희망’이 차오른다. “그래, 나도 한 번 열심히 살아보자”는 에너지가 솟아오르게 한다.


사진이 말하는 일관된 메시지는 ‘희망’


 

박경림, MC


내가 감동하지 못하면 남을 감동시킬 수 없다. 현장에서 기자가 감동하지 못한 것을 사진과 글로 전달하여 제3자를 감동시키기는 어렵다. 최재천 국립생태원장의 사진과 글도 그렇다. 어려웠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최 원장이 그 시절을 ‘아름다운 방황’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에 쏙 들어왔다고 했더니 실은 권혁재 기자도 그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자신의 생각을 바꿨다는 말을 했다. 사춘기를 맞은 아들과 불화를 빚는 중이었는데 방황조차 아름답다는 그 말에 감동하여 아들을 그냥 그대로 지켜보게 되었다고 했다.

 
“인터뷰하면서 사람들의 삶에 감동하고 만난 후에도 그 감동이 나를 바뀌게 한다는 것이 인물사진을 찍으며 얻는 보너스입니다.” 


시인은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흔들리면서 꽃대를 세우고 꽃잎 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흔들림과 젖음은 차라리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이고 곧 꽃을 피울 것이라는 희망의 전조로 읽을 수 있다. 

 
“불완전 초상에 착안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완전한 사람, 완전한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 지금 성공한 모습일지라도 그 안에는 다 상처와 고통을 이겨낸 흔적이 들어 있지요. 그래서 잘난 겉모습이 아니라 고통까지 가슴에 품고 다스려가며 살고 있는 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는 지난해 책 출간에 이어 올해엔 인물사진전을 열고 싶다고 말했다. 만약 전시를 열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시청 앞 광장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사진을 보면서 사진 속 인물들의 메시지를 읽기를 바라는데 결국 그들이 보내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요즘 우리 젊은 세대가 행복하지 못한 것도 희망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나누자는 컨셉으로 전시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 부끄러워질 사진은 찍지 말자

 

권혁재 ⓒ사진예술


기자 권혁재의 사진이 역사가 되고 계속 사진을 찍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요즘 그의 화두라고 했다. 물론 답은 모른다. 그래서 지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적어도 나중에 부끄러워질 사진은 찍지 말자는 각오로 임할 뿐이다.


남들 앞에 서는 걸 두려워했고 수습기자 시절 슬라이드가 뭔지도 몰랐지만 늘 사람 앞에 서야 하고 그 사람의 일생을 압축하는 한 장의 사진을 만들어내야 하는 사진기자의 역할을 멋지게 수행해나가는 권혁재 기자를 보면서 우리가 한 사람의 미래를 섣부르게 예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함을 깨닫는다. 물속의 돌멩이를 들어내면 가재가 나오듯 수줍음을 뒤집으면 예민한 감수성이 드러나고 고통을 들어내면 삶의 깊숙한 곳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긴다. 그래서 이 세상에 헛된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희망을 가져도 좋다, 어떤 경우에도.


인물에 집착하는 권혁재 기자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에는 카메라 한 대 들고 휭하니 밖으로 나돈다고 했다. 자연에서 치유받기 위해서다. 작은 꽃 한 송이 찍기 위해 땅에 배 깔고 엎드려 한 두 시간 몰두하다 보면 어느새 피로는 가시고 다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한 권의 책을 놓고 그 첫 페이지를 열 때의 설렘처럼 그 행복감처럼 누군가의 삶을 앞에 두고 첫 문장을 듣기 시작하는 일, 그리고 한 장의 인물사진으로 마침표를 찍는 일은 앞으로 권혁재 기자, 아니 사진가 권혁재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다. 그는 사진으로 희망을 주고 싶어 하고 결국은 사람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비하인드”에 실린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을 빌린다면 권혁재,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글 : 윤세영 편집주간
이미지  : 권혁재 작가

해당 기사는 2017년 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